2021. 3. 5.

 

NK투데이에서는 <북한은 왜?> 시리즈를 통해 북한의 현대사, 그리고 오늘의 모습을 살펴보는 장기 기획기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광복을 ‘외세에 의해 어느 정도 주어졌다’고 배우고 있다.

그렇다면 북한은 어떨까?

토지몰수 등을 통해 친일청산을 철저하게 진행한 입장에서 북한은 일제의 패망, 그리고 독립운동에 대해 어떤 평가를 내리고 있을까?

1983년 북한에서 출간된 ‘현대조선역사’는 일제의 항복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아군부대들의 드센 공격과 인민들의 혁명적 진출 앞에서 더는 견딜 수 없게 된 일제의 ‘대본영’은 조선인민혁명군의 최후공격작전이 개시된지 불과 1주일도 못되는 1945년 8월 15일 황급히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였다.”   

-김한길, “현대조선역사”, 일송정, 1988, 160쪽.)



즉, 북한 역사책은 민중들의 투쟁과 조선인민혁명군의 공격으로 일본이 항복하고 한반도에서 물러났다고 작성해 놓은 것이다.

그렇다면 무슨 근거로 이런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일까?

현재까지 한국에서 출간된 역사서적들에 기초하여 그 근거들을 살펴보도록 하자.

[북한은 왜?] 북한은 광복을 ‘쟁취한 것’으로 본다?
– 독립운동에 대한 평가


1. 일제에 용감하게 저항해온 우리민족


2. 일제로부터 어떻게 해방할 것인가.


3. 전민항쟁 준비단계
 1) 항일유격구와 군대
 2) 동북항일연군
 3) 조국광복회
 4) 국제연합군 제88여단(동북항일연군 교도려)


4. 전민항쟁
 1) 2차 세계대전의 종말
 2) 전민항쟁의 진행
 3) 국내진공작전

 

5. 동북항일연군 교도려와 소련군의 진주가 없었다면?

※ 현재 한국 역사책에서 19세기 말, 20세기 초 우리 민족을 ‘조선’보다는 ‘한국’이라는 표현으로 더 많이 부르고 있다. 1897년 고종이 선포한 대한제국의 약칭으로 ‘한국’이라고 쓰는 것이다. 그러나 1910년 8월 22일 한국병합에 관한 조약이 강제로 체결되면서 대한제국이라는 국가는 완전히 소멸되었다. 그러면서 대한제국은 ‘조선’이라는 지역 명칭으로 불려졌고 민중들 역시 ‘조선국권회복단’, ‘조선국민회’, ‘조선공산당’, ‘조선여성동우회’, ‘조선일보’ 등 조선이라는 명칭을 더 많이 썼다. 대한제국이 왕조 교체 없이 1392년에 설립된 조선이라는 나라의 연장선에 불과했다는 점, 오늘날 순종 역시 조선의 마지막 왕으로 불려왔다는 점 등에 기초하여 이 연재글에서 당시 한반도 지역을 ‘조선’으로 표현하려고 한다. 이 글에서의 ‘조선’이 현재 북한(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밝혀둔다.


 

3. 전민항쟁 준비단계

 

1) 항일유격구와 항일유격대


그렇다면 만주지역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가들이 본격적으로 전민항쟁을 준비했던 과정은 어떠했을까?

“20세기 우리역사”, “한국근현대민족해방운동사” 등 현재까지 한국에서 발간된 역사책들에 토대하여 그 과정을 살펴보도록 하자.

우선 전민항쟁을 준비하기 위해서는 상비무력 즉, 군대부터 꾸려야 했다.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가들은 1931년 12월 연길현 명월구 (현 명월진, 明月镇)에서 조선독립과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군대를 꾸릴 것을 결정했다.

- 이재화, “한국근현대민족해방운동사-항일무장투쟁사편”, 백산서당, 94쪽.



회의에서는 원산총파업, 광주학생운동 등 반일투쟁이 세차게 일어나고 있는 정세에 맞춰 만주지역에서는 유격군(독립군) 및 유격구(해방구)를 꾸리기로 결정했다.

1932년~1933년 당시에는 일제가 만주를 침략하고 만주국을 세우면서 만주지역의 통치권력이 일종의 공백기를 겪던 시기였다.

1931년 10월 중국공산당도 ‘만주 병사공작에 관한 지시’를 내려 만주지역 반일대중을 중심으로 유격대를 창건하고 유격구를 개척할 것을 지시한 바 있었다.

-강만길, “20세기 우리역사”, 창작과비평사, 1999,136~146쪽.



따라서 만주지역 조선인들은 중국인들과 함께 연합하여 유격구와 유격대를 꾸렸다.

1932년 4월 안도현에서 김일성 대장(훗날의 김일성 주석)이 주도하는 반일인민유격대가 창건되었다.

-이정식, 스칼라피노, “한국공산주의운동사 Ⅰ”, 돌베개, 1986, 278쪽.

 

 

 

안도현에서 반일인민유격대가 꾸려졌다는 기념비. ⓒ이창기

 


북한에서는 이 날을 건군절로 기념해왔다. (현재 북한은 건군절을 조선인민군 창건일인 2월 8일로 변경하였다.)

반일인민유격대는 자체로 칼, 창, 곤봉, 고춧가루폭탄, 화약 등을 제조했고 이것을 이용하여 일제의 현대적인 무기들을 빼앗아 스스로를 무장했다.

안도에서 인민유격대가 창건된 후 연길, 화룡, 왕청, 훈춘 등 각 현에서 현 단위의 항일유격대가 꾸려졌다.

이 지역들은 대부분 조선 북부 국경과 인접한 동만주지대였다.

1933년 말 동만주 지역 항일유격대의 민족별 구성은 조선인 565명, 중국인 16명으로 총 600명 규모를 유지했던 것으로 파악된다.

-이정식, 스칼라피노, “한국공산주의운동사 Ⅰ”, 돌베개, 1986, 226쪽.



유격대는 중국공산당과 협력 하에 동만주지역 조선인들이 많이 살던 왕우구·소왕청·석인구·대황구·연통라자 등을 유격구로 형성했다.

 

처창즈의 항일유격근거지 기념비 ⓒ이창기

 


유격구는 급격히 확대되어 1933년 말 13개의 고정된 해방구로 발전했으며, 총 3만 여 명의 인구를 포용할 만큼 크게 성장·발전했다고 한다.

 

 

유격구에서 유명했던 어린 항일투사 김금녀(금순)의 모습. ⓒ이창기

 


유격구에서는 인민혁명정부가 주민들을 대중단체로 묶고 끊임없이 반일교양사업을 진행했고 유격대의 확장에 큰 기여를 했다고 한다.

유격구는 해방된 사회의 원형을 실현함으로써 사람들에게 독립투쟁에 대한 확신을 주는 역할을 했다.

 

참고) 인민혁명정부 정강

Ⅰ. 인민혁명정부 통제구역 내에 있는 모든 노동자, 농민, 유격데병사·지휘관 및 학생, 상인 기타의 반일, 반만, 반제 대중 및 그들의 가족을 남녀, 종족, 종교·신앙의 차별 없이 모두 평등하게 혁명정부의 공민으로서 평등권을 가지며 16세 이상은 모두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갖는다. 단 매국적 민족반역자, 일본제국주의 및 괴뢰만주국의 앞잡이, 반혁명분자에게는 선거권·피선거권이 없고 정치적 자유도 없다.
Ⅰ. 일본 및 모든 제국주의와 매국노의 은행, 철도, 광산, 기업소, 토지 및 기타의 재산을 몰수하여 반일군비로 충당하며 일부분은 빈곤한 인민에게 분배한다.
Ⅰ. 일본에 반대하는 모든 피압박민족과 공동전선을 결성한다.
Ⅰ. 인민의 무장으로 반만항일을 행한다.
Ⅰ. 가렴잡세를 폐지하고 통일누진세제를 실시한다.
Ⅰ. 언론, 출판, 집회, 결사, 독서 및 스트라이크(파업)의 자유를 보장한다.
Ⅰ. 8시간 노동제와 최저임금제를 실시하고 실업자 및 이재민을 구제한다.
Ⅰ. 소작농민에게 2·8 소작제를 실시한다. (20% 지주, 80% 농민)
Ⅰ. 소수민족의 자결권을 확립한다.

-이재화, “한국근현대민족해방운동사-항일무장투쟁사편”, 백산서당, 134쪽.



또한 유격대 인원이 보충되고 군사훈련, 학습, 휴식 등을 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줌으로써 반일인민유격대가 급격히 성장할 수 있도록 보장했다.

 

인민혁명정부가 꾸려진 유격근거지임을 표시한 기념비 ⓒ이창기

 

 

2) 조선인민혁명군과 동북항일연군



1934년 3월 각 지방의 유격대들은 조선인민혁명군을 결성했다.

-장세윤, “1930년대 만주지역 항일무장투쟁”, 한국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41~145쪽.

한국 역사학계에서 낸 이 책에 따르면 조선인민혁명군의 존재에 대해 1930년대 전반기 일부 중국인들 사이에서 확인된다고 한다.



한국 학계에서는 조선인민혁명군이 만주지역에 살던 우리 민족이 대거 참여해 성립한 부대로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독립사(독립사단)이라고 보고 있다.

-강만길, “20세기 우리역사”, 창작과비평사, 1999,136~146쪽.

 


동북인민혁명군은 중국공산당이 1933년 “1월서한”을 채택하면서 동만주·남만주·북만주 등지에서 활동하던 유격대들을 개편한 연합군이었다.

조선인민혁명군은 2~3개의 독립연대로 편성된 수개의 독립사단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반일인민유격대가 최초로 세워진 지 2여 년 만에 일종의 정규 군대 정형을 갖추게 된 것이다.

장세윤의 “1930년대 만주지역 항일무장투쟁”가 인용한 자료에 따르면 당시 조선인민혁명군 규모가 3천명이었다고 한다.

3개 소대가 1개 중대로, 3개 중대가 1개 대대로, 3개 대대가 1대 연대로 편성되었고 중대마다 정치지도원, 대대, 연대에는 정치위원이 있었고 사단 및 군에는 정치부가 있었다.

조선인민혁명군은 이후 여러 전적을 쌓았는데 1934년 6월 만주지역 중국인부대인 구국군과 함께 연대하여 라자구 시내를 해방시키기도 했다.

또한 1934년 9월 탄광노동자들의 집결지인 연길현 노항구로의 진공작전으로 도시를 일시에 해방시키는 전적을 쌓기도 했다.

조선인민혁명군은 1934년 10월~1935년 초까지 북만주로의 원정을 진행한 후 1935년 요영구회의에서 유격구를 해산하고 더 넓은 지대로 진출하여 적극적인 무장투쟁을 벌일 것을 결정한다.

이후 조선인민혁명군은 백두산지구 유격구를 새롭게 건설하고 국경지대에서 무장투쟁을 전개해 나갔다.

1937년 6월에는 압록강을 건너 조선 갑산군 보천보를 공격하여 국내에 큰 관심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강만길, “20세기 우리역사”, 창작과비평사, 1999,136~146쪽.

 

 

 

보천보전투소식을 전한 동아일보.


한편 1936년 2월 중국공산당이 “동북항일연군 군대 편제를 통일할 것에 관한 선언”을 발표하면서 동북지역 무장조직들이 통합되어 동북항일연군 제1군부터 제11군으로 편성되었다.

동북항일연군 주요간부 저우바오중(주보중)이 쓴 “저우바오중문선”(1987, 51쪽)에 따르면 “항일연군 제2군은 동시에 ‘조선인민혁명군’이었다”고 되어 있다. 

-장세윤, “1930년대 만주지역 항일무장투쟁”, 한국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41~145쪽.

“재만한인들이 대거 참여해 성립된 이 부대를 중국인들도 경우에 따라 ‘조선인민혁명군’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있었던 것이다.”고 적혀 있다.

 


조선인민혁명군은 훗날 동북항일연군 제1군과 제2군을 합쳐 편성된 제1로군(양징우 총사령)에 배치되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