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3. 11.

현재 북한의 공식 국가명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다.

1948년 9월 9일에 수립되었다.

그리고 현재 조선노동당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영도’하고 있다.

영도라 함은 ‘앞장서서 지도하고 이끎’을 뜻한다.

-다음(Daum) 한국어 사전

 

그렇다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조선노동당이 세워진 과정은 어땠을까?

그리고 어떻게 정당이 국가 전반을 이끌게 되었을까?

이번 글에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조선노동당의 탄생과정을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고 “20. 북한은 선거를 할까? – 북한의 선거, 정치시스템”에서 당의 국가 영도 시스템을 다룰 예정이다.


 


국가와 당을 어떻게 건설했을까? ① 

1.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건설과정  

 

 

해방 후 우리 나라에서 국가건설의 움직임은 건국동맹, 그리고 건국준비위원회에서 시작되었다.

 

1) 인민위원회와 조선인민공화국

-박세길, “다시쓰는한국현대사1”, 돌베개, 2015년 신판, 40~60쪽에서 대부분 인용. 

 

1945년 광복 직후 독립운동가들은 전국 도처에 건국준비위원회를 만들기 시작했다.

일제패망을 예견하고 1944년부터 건국동맹을 꾸려 해방을 준비해온 독립운동가 여운형 선생은 1945년 8월 15일 아침 일본 엔도 정무총감으로부터 ‘행정권 인수 의사’를 받았다.

여운형 선생은 ‘1) 조선의 정치범·경제범 석방, 2) 수도 경성에 3개월치 식량 보장, 3) 치안유지와 건설사업에 대한 일체 불간섭, 4) 학생훈련과 청년조직화에 대한 불간섭, 5) 일본 노무자들의 조선 건설사업 협력’까지 총 5가지 조건을 요구했고 조선총독부는 이를 수락한다.

그 후 천황의 항복발표날인 8월 15일 저녁 건국동맹 위원들을 모아 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했다.

17일에는 총독부로부터 치안유지의 권한, 방송국, 각 언론기관 등을 이양받았다.

여운형 선생과 독립운동가들은 신속하게 건국준비위원회를 꾸려나가면서 8월 말 경까지 건국준비위원회 지역 지부를 건설한다.

건국준비위원회는 곧 인민위원회로 전환했다.

지역 인민위원회들은 조직부·선전부·치안부·식량부·재정부를 갖고 지역별 특성에 따라 보건후생, 귀환동포, 소비문제, 노동관계, 소작료 등의 문제를 다루기도 했다.

인민위원회가 명실상부한 지방자치기구로 역할을 수행한 것이다.

경상북도 영양군 인민위원회의 경우 극빈자를 위해 쌀을 구입할 돈 170만원(현재로 환산하면 2억원)을 거둘 정도로 군 내 지위가 상당했다.

건국사업에서 중요한 일은 바로 치안을 정비하는 것이었다.

해방 다음날(8월 16일) 건국청년치안대가 바로 꾸려졌다.

훗날 건국청년치안대는 전국의 학도대·청년대·자위대·노동대 등을 흡수해 162개 지부를 둔 단일한 체계인 건국치안부로 발전한다.

일제에 의해 강제 징집된 사병들을 중심으로 국군준비대가 창설되기도 했다.

국군준비대에는 약 6만여 명의 군인들이 소속되어 있었으며 일부는 군사훈련에 돌입했다.

이렇게 독립국가 건설을 위한 민중들의 자치활동이 활발하게 진행되던 중 미국은 38선 이남에 점령군으로 들어올 의사를 밝힌다.

9월 8일에 미군이 진주한다는 소식을 들은 각 지역 대표들은 조선인 자치권이 침해당할 것을 우려해 국가 수립을 서둘러 선포하기로 결정했다.

이렇게 하여 1945년 9월 6일 전국 대표 1,000여 명이 서울에서 회합을 갖고 ‘조선인민공화국’ 창건을 발표했다.

조선인민공화국은 가장 급박한 과제로 부각되고 있던 일본 법률의 완전한 폐기, 친일파 토지몰수, 철도·통신·금융기관의 국유화 등의 정책을 발표했다.

 

2) 조선인들의 자치를 부정한 미국

그러나 이틀 후 인천항을 통해 들어온 미군은 자신들이 ‘남한을 점령’했다면서 38선 이남의 모든 정치기구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포고문을 내렸다.

9월 7일 일본 요꼬하마에서 발표된 멕아더의 포고문 ‘조선 인민에게 고함’ 제 1조에는 ‘38도선 이남의 조선 영토와 조선 인민에 대한 최고통치권은 당분간 본관의 권한 하에 시행된다.’고 명시되어 있었다.

우선 미 군사정부(미군정)은 과거 일본 총독부의 지위와 체계를 그대로 인수했다.

9월 9일 하지 미군 중장과 아베 일본 총독은 조선총독부 제1회의실에서 항복 조인식을 가졌다.

이것은 아베가 미국의 요청에 따라 여운형 선생에게 이관되었던 행정권을 다시 빼앗아 미국에 넘겨준 것이었다.

조선총독부 건물에 성조기를 올린 미군정은 자신만이 남한 내 유일한 정부임을 선언하면서 조선인민공화국을 부정했으며 모든 인민위원회를 해산시켰다.


일장기가 내려가고 성조기가 올라가는 모습. 1945년 조선총독부 앞.(아래 사진은 원본 사진을 채색한 것임)

 

 

전남 인민위원회의 경우 미군은 11년간 옥살이를 했던 독립운동가이자 광주 치안대 지도자였던 김석을 체포·처형한 후 일제 강점기 도지사였던 일본인 야기 노부오에게 시민권을 바꾸어 한국에 영원히 남아있을 것을 제안하기도 했다. 

-브루스 커밍스, 김주환 옮김, “한국전쟁의 기원(하)”, 청사, 1986, 144~145쪽.

 

1945년 10월 15일 전라북도 남원에서는 미군의 지원을 받는 친일경찰들이 국군준비대와 크게 충돌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미군정은 조선인들이 꾸린 국군준비대를 강압적으로 해체하고 그 간부들을 체포해 중형에 처해버리기도 했다.

-박세길, “다시쓰는한국현대사1”, 돌배게, 2015년 신판, 76쪽.

 

3) 38선 이북지역 인민위원회의 활동

38선 이남에서의 모든 자치활동이 금지되고 9월 6일 건립된 조선인민공화국까지 해체당하자 38선 이북지역은 독자적인 활동을 꾸려나갈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이북에 진주한 소련군은 조선인들의 자치활동을 어떻게 바라봤을까?

-8월 9일 일본에 선전포고한 소련군은 8월 11일부터 한반도 내 일본군들과 전투를 벌이며 차례로 북부 도시를 ‘해방’시키면서 한반도 아래로 내려온다. 거의 서울 근처까지 다다랐던 소련군은 미국의 38선 분할 제안에 38선 이북으로 다시 철수했다.

 

8월 24일 평양에 입성한 소련군은 기존 총독부 체제를 그대로 인수해 치안을 유지하고자 했다.

-박세길, “다시쓰는한국현대사1”, 돌배게, 2015년 신판, 101쪽.

 

그러나 각 지역마다 인민위원회가 꾸려지는 모습을 확인한 소련군은 곧 일본인들을 추방하고 건국준비위원회 지방지부가 총독부의 행정권을 접수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8월 25일)

이북 인민위원회가 이남과 달리 지속적으로 통치권을 행사할 수 있는 조건을 확보한 것이다.

소련군은 조선인들의 치안대·보안대·인민방위군 등 각종 무장조직의 활동도 보장했다.

-박세길, “다시쓰는한국현대사1”, 돌배게, 2015년 신판, 104~105쪽.

 

이들 대소규모 무장조직들은 1945년 10월경에 이르면서 도 인민위원회 차원의 보안대로, 12월에는 북한 전역을 포괄하는 단일한 보안대 체계로 발전하게 된다.

 

※참고

 

소련군이 해방된 조선을 어떻게 바라봤는지에 대한 인식을 살펴보려면 소련군이 선포한 환영문을 살펴보면 된다.


환영문에서 소련군은 “조선인민은 반드시 스스로 자기 행복을 창조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공장, 제조소 및 공작소 주민들과 상업가 또는 기업가들이여! 왜놈들이 파괴한 공장과 제조소를 회복시켜라! 새 생산 기업체를 개시하라!”고 제안했다.

조선 인민들에게!  조선 인민들이여! 기억하라! 행복은 여러분들 수중에 있다.
여러분들은 자유와 독립을 찾았다.
왜놈들은 고대광실에서 호의호식하여 조선 사람들을 멸시하며 조선의 풍속과 문화를 모욕한 것을 당신들이 잘 안다.  이러한 노예적 과거는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진저리 나는 악몽과 같은 그 과거는 영원히 없어져 버렸다. 이제는 모든 것이 여러분에게 달렸다.
붉은 군대는 조선 인민이 자유롭게 창조적 노력에 착수할만한 모든 조건을 만들어놓았다. 조선인민은 반드시 스스로 자기 행복을 창조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공장, 제조소 및 공작소 주민들과 상업가 또는 기업가들이여!
왜놈들이 파괴한 공장과 제조소를 회복시켜라!
새 생산 기업체를 개시하라!
붉은 군대 사령부는 모든 조선 기업소들의 재산을 보호하며
그 기업소들의 정상적 작업을 보장하기 위하여 백방으로 원조할 것이다.

– 소련군 사령관 치스차코프 환영문 –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