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3. 14.

현재 북한의 공식 국가명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다.

1948년 9월 9일에 수립되었다.

그리고 현재 조선노동당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영도’하고 있다.

영도라 함은 ‘앞장서서 지도하고 이끎’을 뜻한다. (다음(Daum) 한국어 사전)

그렇다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조선노동당이 세워진 과정은 어땠을까?

그리고 어떻게 정당이 국가 전반을 이끌게 되었을까?

이번 글에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조선노동당의 탄생과정을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고 “20. 북한은 선거를 할까? – 북한의 선거, 정치시스템”에서 당의 국가 영도 시스템을 다룰 예정이다.

 

 



 

국가와 당을 어떻게 건설했을까? ⑥ 
1.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건설과정 


(계속)

 

1947년 7월 27일에는 전국적으로 임시(중앙)정부 수립 촉진 인민대회가 개최되었다.

개성 2만 여명, 수원 4만 여명, 인천 10만 여명, 대전 7만 여명 등 남조선 전역에서 수십 만 명이 참가했다.

그리고 1948년 30만 노동자들이 총파업을 단행하면서 2‧7 구국투쟁이 진행되었다.

2‧7구국투쟁에서 민중들이 외친 구호는 다음과 같았다.

 

1. 조선의 분할침략계획을 실시하는 유엔 조선위원단을 반대한다.
1. 남조선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한다.
1. 양군 동시철퇴로 조선 통일 민주주의 정부 수립을 우리 조선인에게 맡기라.
1. 국제 제국주의의 앞잡이 이승만, 김성수 등 친일반동파를 타도하자.
1. 노동자, 사무원을 보호하는 노동법과 사회보험제를 즉각 실시하라.
1. 노동임금을 배로 올리라.
1. 정권을 인민위원회로 넘기라.
1. 지주의 토지를 몰수하여 농민들에게 나누어 주라.
1.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만세.

-박세길, “다시 쓰는 한국현대사1”, 돌베개, 1988년, 104쪽. 여기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1945년 9월 6일 전국에서 모인 1,000여 명의 민중 대표들이 서울에서 창건을 선포한 ‘조선인민공화국’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유엔 감시 하의 남북 총선거를 반대하고 나선 것이다.

2월 10일 한국독립당의 김구는 “3천만 동포에게 읍소한다”는 제하의 호소문을 발표해 분단으로 이어질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했다.

-박세길, “다시 쓰는 한국현대사1”, 돌베개, 1988년, 110쪽.

 

“독립이 원칙인 이상 독립이 희망 없다고 자치를 주장할 수 없다는 것을 왜정 하에서 충분히 인식한 바와 같이 우리는 통일정부가 가망 없다고 단독정부를 주장할 수 없는 것이다. 단독정부를 중앙정부라고 명명하여 자기 위안을 받으려 하는 것은 군정청을 남조선 과도정부라고 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는 것이다. …이 육신을 조국에 요구한다면 당장에라도 제단에 바치겠다.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에 구차한 안일을 취하여 단독정부를 세우는 데는 협력하지 아니하겠다.”

 

 

이북 역시 유엔 한국위원단의 입국을 막아나섰다.

1948년 3월 1일 유엔 임시위원단은 북한이 자신을 받아들이지 않으므로 5월 10일 이전에 남조선만의 단독선거를 치르겠다고 발표한다.

이런 유엔 임시위원단의 발표는 우리 민족의 분노를 더욱 지펴 올랐다.

3월 12일에는 김구, 김규식, 조소앙, 김창숙, 조완구, 홍명희, 조성환 등 대표적인 정치 인사 7인은 공동성명으로 남한 단독선거에 대한 반대의사를 표명하게 된다.

“미‧소 양국이 군사상의 필요로 일시 설정한 소위 38선을 국경선으로 고정시키고 양 정부 또는 양 국가를 형성하게 되면 남북의 우리 형제 자매가 미‧소 전쟁의 전초선을 개시하여 총검으로 서로 대하게 될 것이 명약관화하니 우리 민족의 참화가 이에서 더 할 것이 없다.”

 

3월 23일 김규식과 안재홍 등이 중심이 된 민족자주연맹도 다음과 같은 결의문을 발표했다.

 

1. 우리는 우리의 민족통일과 국가독립을 성실히 원조 협력하는 국제노력에 협조하고 동시에 이에 위배되는 여하한 국제노력에도 타협하지 않는다.
1. 외국군대 주둔을 연장하려는 기도와 행동은 단호히 배격한다.
1. 우리는 진실한 애국세력의 총집결운동을 강력 추진할 것이며 단선 단정을 반대한다.
1. 남북통일 민주독립의 길이 열릴 때까지 남북 정치협상 공작의 추진에 노력키로 결의한다.

 

 

이북 곳곳에서도 단독선거 반대 군중집회들이 벌어졌다.

3월 14일에서 17일에 걸쳐 평양 42만, 평안남도 35만, 평안북도 50만, 함경남도 29만, 함경북도 48만, 황해도 100만, 강원 42만명이 참가하는 집회가 개최되었다.

결국 단독정부 수립을 원치 않았던 민중들은 총을 들고 나서기 시작했다.

4월 3일 제주에서 미국의 민족분열과 남조선에 대한 식민지 예속화 정책에 반대하여 30만 제주도민들이 항쟁의 포문을 연 것이다.

4‧3항쟁에 주도적으로 참가한 3,000명의 무장‧비무장대원들은 다음의 구호를 외치며 대대적인 궐기를 호소했다.

 

1. 미군은 즉시 철수하라!
2. 망국 단독선거 절대 반대!
3. 투옥중인 애국자를 무조건 즉시 석방하라!
4. 유엔 한국임시위원단은 즉각 돌아가라!
5. 이승만 매국도당을 타도하자!
6. 경찰대와 테러집단을 즉시 철수시켜라!
7. 한국 통일 독립 만세!

 

 

제주도 뿐 아니라 전국적으로 유엔 감시하의 선거, 이남만의 단독선거를 반대하는 민중들의 저항으로 들끓기 시작했다.

 

③ 연석회의 제안

 

1948년 3월 25일 북조선 민전은 “남조선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는 남조선 정당 사회단체에 고함”이라는 제목으로 공동성명서를 발표한다.

-박세길, “다시 쓰는 한국현대사1”, 돌베개, 1988년, 112~118쪽.

 

성명서에서 이들은 “북조선 정당 사회단체의 지도자들인 우리들은 남조선 단독선거 실시를 반대하여 투쟁하는 남북조선의 모든 민주주의 정당 사회단체 대표들과 연석회의를 금년 4월 14일 평양에서 개최할 것을 제의합니다.”라며 위기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회의를 개최할 것을 절박하게 요구했다.

이 제안은 이남 지역에서 광범위한 호응을 얻어냈다.

대부분의 이남 모든 정당은 이북의 제안서를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한국독립당, 근로인민당, 민주한독당, 신진당, 민중동맹, 사회민주당 등 이남의 100여 개 정당‧사회단체도 단독선거 반대를 기치로 내걸고 ‘통일독립운동자협의회’를 결정해서 연석회의를 적극 지지했다.

이남 문화인 108명도 공동성명서를 발표하면서 “양군의 동시 철퇴를 실제적으로 가능케 할 기본 토대를 짓기 위하여 우선 우리는 우리 자신의 체제를 단일하게 정비 강화하자! 이 길은 오직 남북협상에 있다.”고 하면서 연석회의 지지 성명서를 제출했다.

이렇게 하여 열린 것이 바로 ‘남북 제정당 사회단체 연석회의’였다.


 

연석회의 기념 우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