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3. 16.

*한국전쟁을 두고 남북은 정반대의 입장을 가지고 있습니다. 남북이 화해와 통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서로의 입장을 잘 아는 것도 중요합니다. 이번 연재는 한국전쟁에 대해 북한이 어떤 입장을 가지고 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준비하였습니다. 따라서 기본 자료와 내용은 전적으로 북한의 입장을 토대로 한 것이며 NK투데이의 입장과는 무관함을 알려드립니다.

 


 


원자폭탄과 폭격

 

전선이 후퇴하자 맥아더 총사령관은 미국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북한 지역에 원자폭탄을 쏘겠다고 제기했다.

맥아더는 수십 개의 핵폭탄을 북한과 만주의 경계에 쏘자고 제의했고 1950년 11월 30일 유엔군의 후퇴가 시작되던 때 미국 트루먼 대통령은 “원자폭탄의 사용을 고려 중이고 그 권한이 맥아더에게 주어졌다”고 언급했다.

실제 1950년 12월 미군 비행기는 조립되지 않는 폭탄들을 운반해 평양에 대한 모의 원폭 공습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전 세계 여론의 반대에 부딪힘으로써 미국은 핵무기 사용을 포기했고 맥아더는 해임되었다.

미국이 핵을 사용하지 못한 이유는 1) 한반도의 70% 이상이 산맥이라 그 효과가 크지 않다는 점, 2) 대부분의 북한 시설들이 모두 지하로 들어갔다는 점, 3) 아군과 적군이 함께 ‘공존’한다는 것 – 히로시마·나가사키 폭격 당시에는 미군이 일본에 없었음–  4) 세계 여론의 반발 등 때문이었다.

그러나 미국은 이대로 북한 점령 계획을 포기하지 않았다.

핵무기를 제외하고 미국이 선택한 전략은 ‘초토화작전’이었다.

압도적 공군 전력으로 북한 전역-후방을 폭탄의 불바다로 만들어 북한군의 전력을 약화시키겠다는 계획이었다.

미국은 전선이 어디든 전 북한 지역에 네이팜탄을 비롯해 수많은 폭탄, 기총사격을 퍼부었다.

당시 평양시의 인구가 약 40만 명이었는데 미국은 평양시에만 42만 8,700여 개의 폭탄과 네이팜탄을 투하했다.

인구 1인당 폭탄 1개 이상씩 터트린 셈이다.

빈틈 없는 폭탄 세례로 1951년 10월 경부터는 출격에 나선 미 공군기들이 더 이상 폭격 대상을 찾지 못하고 되돌아오기도 했다.

3년 간의 한국전쟁 기간 동안 미국이 북한에 퍼부은 폭탄 수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동남아에 퍼부어진 폭탄 수와 거의 같았다.

전쟁 막바지인 1952년 6월 22일과 24일에는 당시 한반도 최대의 발전소였던 수풍댐을 폭격, 저수지의 둑까지 파괴해 수천 여명의 사람들이 급류에 흽쓸려 사망하게 했다.

이런 미국의 대규모 폭격 속에서 북한 당국이 가만히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전투에 임하는 군인들을 위해 끊임없이 생산도 이루어져야 했다.

따라서 북한은 1) 방공호를 파서 주요 시설을 지하에 넣는 것, 2) 폭격이 뜸한 야간에 생산활동을 전개하는 것, 3) 항공기 전력을 강화하는 것, 4) ‘비행기 사냥’을 하는 것을 전략으로 내세웠다.

계획에 따라 북한은 우선 국가 주요시설, 공장·기업소를 최대한 지하로 넣어 생산을 보장했다.

주민들의 생활 역시 지하 방공호에서 이루어지도록 했다.

전쟁 중 월북한 과학자 리승기의 경우 장진 부근 지하연구소에서 비날론 연구를 했다고 한다.

북한의 항공전력 강화 노력이 유엔군 전투기 폭격을 실질적으로 막아내기도 했다.

북한의 새로운 비행장 건설을 파탄내기 위해 100여 대의 호위 전투기와 함께 출격한 수 십 대의 미국 B29폭격기가 북한과 중국 항공기 150대에게 패배하면서 유엔군의 폭격이 급속도로 약화되어 갔다.

그리고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명령 238호 “비행기사냥꾼조를 조직하는 데 대하여”가 발표되면서 저격무기로 무장한 ‘비행기 사냥꾼’조가 광범위하게 조직되었다.

‘비행기 사냥’은 항일무장투쟁 시기 저격무기로 일본군 비행기를 쏴 떨어뜨린 ‘반항공투쟁’의 경험을 일반화한 것이었다.

이 또한 유엔군의 우세한 항공력을 약화시켜 북한 지상부대의 전투행동과 후방의 안전을 보장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