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3. 18.

전쟁 후 복구사업

3년 간의 한국전쟁 당시 미군의 폭격은 북한 전역을 완전히 초토화했다.

파괴된 재산의 값어치는 약 30억 달러(현 화폐가치로만도 3조원)에 달했고 1949년 생산능력을 기준으로 하면 약 6년 동안 이룩한 피땀의 결과를 송두리째 한순간에 빼앗긴 셈이었다.

이런 상태에서 경제 재건을 꾀한다는 것은 사실상 무에서 출발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사실 흩어져 있는 파괴의 잔해물을 치우기 위해 엄청난 인력과 시간이 요구되기 때문에 무에서 출발하는 것보다도 더 처참했다.

북한이 완전한 폐허 위에서 새롭게 경제를 재건해나가기 위해선 ‘사회주의 형제 나라’들의 긴급 원조가 필요했다.

그러나 원조액은 북한이 입은 엄청난 피해에 비해 충분하지 못했다.

북한은 최대한 주민들의 생활을 빠르게 안정화하기 위해 ‘생산관계의 사회주의적 개조’를 추구한다.

모든 상공업, 농업을 협동화, 국유화한 것이다.

이 조치는 폐허 속에서 경제를 효과적으로 운용하기 위해서도 필요했지만 북한 주민들이 처한 상황으로 인해 불가피하게 요청되었던 측면도 있었다.

전쟁으로 혹심한 파괴는 공업과 농업을 막론하고 개인의 힘만으로 자신의 처지를 개선하는 것을 거의 불가능하도록 만들었으며 그것은 오직 서로의 능력과 생산수단을 합칠 때에만 가능했던 것이다.

국가는 개인 상공업자, 수공업자, 농민들이 협동조합을 만들 수 있도록 도와줬고 국민들은 전쟁의 혹심한 피해를 빠르게 극복해갔다.

북한은 미국이 “앞으로 100년이 가도 다시 일어서지 못한다”고 이야기했을 정도로 참혹했던 전쟁의 아픔을 딛고 일어났다.

20세기를 대표하는 경제학자 중 하나인 영국의 조앤 로빈슨 교수는 1965년에 쓴 논문에서 북한의 경제성장을 “전대미문의 기적”이라며 놀라워했다.

1953년부터 1956년까지 북한은 연평균 41.7퍼센트라는 엄청난 성장률을 기록했는데, 세계 신기록 수준이었다.

1953~1962년까지 10년동안 북한 국민소득 연평균 성장률은 22%, 1인당 국민소득 증가율은 17.2%에 달했다.

어떻게 이런 기적이 창출된 것일까?

 

농업협동화의 필요성

폭탄으로 황폐화된 농지와 처참하게 파괴된 관개시설.

농기계, 농사를 짓기 위한 소도 거의 없는 실정에서 농기계, 비료 생산도 원활하지 못했다.

노동 가능한 청장년들이 전쟁으로 목숨을 잃거나 불구가 되어 농업 노동력도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태였다.

노동력이 부족한 조건에서 농업생산의 급속한 향상은 오직 ‘기계화’를 통해 가능했다.

빠른 시일 내에 농기구·농기계·비료 생산을 보장하고 동시에 남아 있는 농기구들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사용해야 했다.

개인이 각자 농사를 짓는 상황에서는 농기구의 효율적인 사용을 보장하기 어려웠다.

게다가 개인이 농기계를 구입해야 했기 때문에 빠르게 기계화 농업을 실현하기 어려웠다.

이런 맥락에서 농업협동화는 불가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