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3. 18.

농업협동화는 전쟁이 끝난 후 불과 4~5년 만에 북한 전 국토에서 시행되게 되었다.

세계 사회주의 역사상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의 빠른 속도로, 그것도 자원성의 원칙에 입각해 ‘무혈·비폭력’으로 농업협동화를 끝낼 수 있었던 데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다.

 

 



무엇보다도 북한에서 농업협동화를 농민들의 정서, 생각 수준에 맞게 추진했기 때문이었다.

북한은 단 한 사람도 ‘자원성의 원칙’에서 배제시키지 않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단 한 사람도 ‘협동조합에 착취당했다’는 인식을 갖지 않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즉, 모두가 ‘자발적으로’ 협동조합에 자신의 토지와 생산수단을 내고 그렇게 하여 모두가 협동조합의 주인이라는 인식을 갖도록 해야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를 위해 각 마을에서는 농민들과의 충분한 토론을 기반으로 자발적으로 농업협동화를 진행할 수 있도록 했다.

전쟁으로 농기구가 부서지거나 가축들이 죽은 조건에서 농민들이 먹고 살기 위해서라도 협동을 통해 농사를 짓거나 국가로부터 농기계를 받는 것이 더 유리한 상황이었음에도 단 한명의 농민이라도 농업협동화의 ‘주인’이 될 수 있도록 조치한 것이었다.

 

“정전 직후 우리 농촌에서 농업 협동화를 가장 적극적으로 지지한 것은 빈농들이었습니다. 우리 당은 우선 빈농들과 농촌의 당 핵심들로써 경험적으로 매개 군에 몇 개씩의 농업협동조합들을 조직하고 그것을 공고화하는 사업부터 시작하였습니다. 우리는 이 사업을 통해 우리나라의 실정에 적합한 협동화의 구체적인 방도와 속도를 정확히 규정할 수 있었으며 간부들로 하여금 협동화 운동을 지도하는 데서 경험을 축척하게 하고 자신심을 가지게 하였습니다. 또한 우리 자체의 경험에 의거하여 협동 경리의 우월성을 실물로 보여줌으로써 광범한 농민 대중, 특히 중농을 설복할 수 있었으며 그들로 하여금 자원적으로 협동조합에 들어오게 할 수 있었습니다.” 

-조선노동당 제4차 대회(1961년 9월) 당 중앙위원회 사업총화 보고 연설

 

 

빈농들이 앞장서서 시작된 농업협동조합에서 다소 생활에 여유가 있었던 농민들의 자발적 참여를 보장하는 것은 쉬운 문제가 아니었다.

실제 ‘부자농민’들의 협동화 참여는 가장 마지막에 이루어졌다.

이들은 실제 농업협동조합의 생산성이 자신의 생산성보다 더 높은 것을 확인하고 협동화 운동의 말기에 스스로 자진해서 협동조합에 들어오게 되었다.

북한은 농업 협동화과정에서 이런 성과를 내기 위해 무엇보다 조선노동당 지역 조직이 매 협동농장에서 국가의 정책을 해설하고 주인의식을 높이도록 하는 일을 꾸준히 강조했다.

북한은 농촌에 조선노동당 지역 조직의 역량을 강화하고 협동조합에 수많은 간부들을 배치하여 협동조합이 공정하게 운영되고 조합원들의 주인의식을 높이도록 꾸준히 노력했다.

이를 위해 북한이 취했던 조치는 협동조합 규모를 너무 크지 않게 한 것이었다.

처음 협동화 사업을 진행할 때는 협동조합 운영 경험이 풍부하지 않은 조건에 맞게 협동조합 규모를 작게 했다.

한 협동조합에 처음에는 15~20호로 출발하여 점차적으로 40~100호정도로 늘려나갔다.

특히 협동조합이 지나치게 큰 규모로 조직하거나 통합하는 것을 금지했다.

점차 운영 경험이 쌓이면서 1958년 말부터 리 단위로 협동조합을 운영할 수 있도록 규모를 넓혔다.

규모의 확대는 토지와 농기계, 비료 등의 합리적 이용, 우수한 영농기술의 빠른 확대 등이 가능하도록 했다.

게다가 관개시설, 토지정리 등도 가능하게 만들었다.

1950년대 후반부터 효율적인 경영과 분배를 위해 농산물의 생산 관리, 유통, 자금 운용까지 모두 농업협동조합이 담당하도록 했다.

개인 상공업자들의 협동조합이었던 소비협동조합과 신용협동조합이 농업협동조합으로 들어와 농산물의 유통, 자금 운용까지 전부 농업협동조합이 관리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를 통해 농업협동조합이 명실상부한 리의 경제 전반을 담당하는 기구로 성장해나간다.

리 인민위원회에서는 리 인민위원장이 리 농업협동조합 관리위원장을 겸임하도록 해서 리 전반 경영을 통합 운영할 수 있도록 했다.

이렇게 되어 농업협동조합은 농촌을 전반 운영하면서 도시와 농촌간의 상품 교류 창구를 단일화하여 수요량과 공급량을 맞춰나갈 수 있었다.

농업 부문에서 사회주의 경제의 고유의 특성인 ‘계획경제’가 실현된 것이다.

 

 

농업협동화 과정을 잘 그러낸 소설이 하나 있다. ‘석개울의 새봄’(천세봉 작)은 북한 농업협동화(1953~1958) 과정을 생생하게 담고 있다. 이 소설에 대한 인기가 대단하다보니 북한에서는 최초의 TV 드라마로 연출해내기도 했었다. ‘석개울의 새봄’은 땅이나 농기계 등이 많은 농민과 가난한 농민들을 대표하는 인물군상들이 농업협동화를 어떻게 이뤄나가는지를 잘 묘사하고 있다.


“아니 그것(조합)보다 조그만 품앗이반이나 소겨리반도 말썽이 많단 말이야…. 흥. 금년에도 바루 우리 작업반에서 장마통에 밭김을 못 매고 있다가 말썽이 났네. 날이 들자 저마끔 제 밭 김부터 매겠다고 야단이니 이게 딱하지 않은가? 그러니 누구네 밭을 먼저 매고 누구네 밭을 뒤에 매겠나. 모두 호미를 들군 제 밭으로 달아갔네. 하마 트면 품앗이반이구 머구 깨져 버릴 뻔 했지…….”

– 이대철, ‘천세봉 소설연구- 석개울의 새봄을 중심으로’, 59쪽  


극 중 인물인 마 영감은 정직하고 양심이 곧고 성실한 농민이지만 협동조합 과정에서 주인공 김창혁과 첨예하게 갈등한다. 마 영감은 조합보다 더 작은 규모의 품앗이도 갈등이 심한데 조합(최대 100가구)을 꾸리면 얼마나 갈등이 심하겠냐고 우려를 제기한다. 뿐만 아니라 마 영감은 토지는 농민들이 정을 붙이지 않고는 소출을 낼 수가 없는데 협동조합을 꾸리면 소출이 잘 나오지 않을 것이라며 우려한다. 이에 김창혁은 이렇게 대답한다.


“아주버이 그러니까 그런 모순이 조합에선 해결된다는 말입니다.토지는 개인 소유이지만 조합이 통일적 계획 밑에 경작하는 거니까 제 땅을 제가 먼저 하겠다는 그런 모순은 없어지고 맙니다.어느 밭을 먼저 김 매서 다수확을 거두게 되던 그것은 조합원 전체의 이익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조금도 그런 말썽은 생길 리가 없습니다. 조합이 품앗이반이나 소겨리 반보다 우월한 점은 우선 거기 있지요.”

- 이대철, ‘천세봉 소설연구- 석개울의 새봄을 중심으로’, 59쪽


조합, 집단의 우월성을 설명해주기도 하고 직접 실천으로 증명해보이기도 한다. 협동조합의 농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풍작을 이루자 결국 마 영감은 조합에 가입하게 된다. 물론 가입하고 나서 활동이 쉬웠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협동조합의 중요한 일들을 하나둘 맡으면서 어느 순간 협동조합 일을 자기 일처럼 받아들이게 된다.


“마영감은 어떻게 된 노릇인지 늘 맘에 허전하던 것은 다 없어져 버렸다. 랭삼모 때문에 말썽을 겪고 나니 한 발자국 앞으로 쭉 나선 것 같고 맘이 새로워 졌다. 어떻게 이모 저모에서 자극이 오는지 언제 낡은 생활을 생각할 사이도 없다. 마음 속엔 자꾸 조합이 강하게 들어 백여 왔다…” 

– 이대철, ‘천세봉 소설연구- 석개울의 새봄을 중심으로’, 63쪽


협동조합이 성공적으로 진행되면서 선진적인 영농기술 역시 빠르게 확산된다. 종래의 온상모법이 아닌 오직 햇빛, 자연열로만 키우는 냉상모를 도입하는 것 역시 빠르게 확산되었다. 평안북도에서 시범적으로 진행된 냉상모법 도입 결과를 직접 보고 온 김창혁은 랭상모를 적극 도입한다. 과정에서 많은 우려와 반대가 있었지만 결국 랭상모 도입은 협동조합의 농사를 성공으로 이끌게 된다.


“이 조합에서도 금년 우리 조합이 냉상모(보온 못자리에서 키운 모)를 시작한 것처럼 전혀 경험이 없는 토대 위에서 지난해 처음으로 랭상모를 도입했습니다. 그러니 만큼 이 조합에도 애로와 난관이 많았습니다…그러나 이 조합에서는 약 20정보의 논에 랭상모를 실시해서 육모로 정당 6톤 수확하던 논에서 일약 15톤의 벼를 수확했습니다.” 

– 이대철, ‘천세봉 소설연구- 석개울의 새봄을 중심으로’, 52쪽


마지막에서 소설 ‘석개울의 새봄’에서 등장하는 인물들 모두 농업협동조합에 가입하고 주인답게 참여하게 된다.

 

 

두 번째 요인으로는 해방 후 토지분배, 한국전쟁 등으로 친일대지주 등 농업협동화에 반대할 만한 세력이 대부분 사라졌던 측면이 있다.

초기 농업협동화가 진행될 때 조선노동당 내에서는 공업부터 사회주의를 하고 농업을 협동화해야 한다는 주장, 농기계가 도입된 후 협동화를 하자는 반대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

그러나 김일성 주석은 북한 주민들의 조선노동당에 대한 지지가 높은 것에 기초하여 농업협동화를 강력하게 추진했다.

“전후(전쟁 후) 시기에 우리나라의 도시와 농촌에서 사회주의적 개조를 반대하는 세력은 미약하였습니다. 우리의 농민 대중은 일제와 지주를 반대하는 장기간의 혁명 투쟁과 해방 후 새 생활 건설을 위한 투쟁을 통하여 정치적으로 각성되였으며 당 주위에 굳게 단결되었습니다. 대다수의 기업가, 상인들은 해방 후 전체 인민과 함께 민주혁명의 수행에 참여하였을 뿐만 아니라 사회주의 건설에서도 우리 당과 인민정권의 시책을 지지하였습니다. 인민대중 속에서 당의 위신이 높고 각계 각층 인민들이 당 주위에 집결되고 대중의 정치적 각성이 제고된 것은 사회주의적 개조를 성과적으로 진행하는 데서 가장 중요한 담보로 되었습니다.”

위 두가지 요인으로 인해 농업협동화는 ‘무혈비폭력’으로 진행될 수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