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3. 18.

1950년대 ‘기브 미 더 초콜릿’의 기억, 북한은 어땠을까?

 

한국전쟁의 피해는 막심하였다.

당시 한국은 국민의 의식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미국에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원조 받았다.

중앙일보와 인터뷰한 한 사람은 “월미도 주둔 미군 해병대 아저씨들이 준 옥수수와 우유를 먹고 자랐고, 명절 때마다 준 초콜릿과 막대사탕을 아껴먹었던 기억이 선하다”라고 회고했다.

-이종원, 한국전쟁 60주년 그후 <3>…전쟁 고아들 입양돼 미국으로, 중앙일보 북미판, 2010.6.24., http://www.koreadaily.com/news/read.asp?art_id=1050238

 

소설가 김훈도 “먼지를 일으키며 달리는 미군 지프를 따라가면서 그들이 던져주는 초콜릿을 받아먹으며 나는 자랐다”고 술회했다.

-김훈, 기브 미 초콜릿의 기억, 씨네21, 2002.7.24., http://www.cine21.com/news/view/?mag_id=11506


그래서 이 시기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표현으로 아이들이 미군에게 외쳤던 “기브 미 더 초콜릿(초콜릿을 주세요)”이라는 말이 꼽히기도 한다.

북한은 한국전쟁으로 더 큰 피해를 보았다.

미국에서는 북한의 전쟁 피해에 대해 “몽골족 침입 경로에 있었던 몇몇 작은 국가를 제외하고는 역사상 어느 나라도 그토록 막심한 물질적 파괴를 당한 적이 없었다”라는 평가가 나올 정도였다.

– Wifred G. Vurchett, Again Korea, New York : International Publishers, 1968(사회주의 북한 엘렌 브룬, 재퀴스 허쉬 김해성 옮김 지평, 1987, 65쪽에서 재인용)

 

북한은 미군의 폭격으로 농지가 황폐해진 것은 물론이고 공업 부분의 피해도 컸다.

북한에서 파괴된 공장과 기업소는 8,700여 개에 달했다.

공업생산은 전쟁 전의 64%로 수준으로 줄어들었고, 전력생산은 한국전쟁 전의 26%, 석탄생산은 11%, 철 생산은 10% 수준에 불과할 정도로 급격히 감소했다.

공업 생산만이 아니라 국민 생활도 피폐해졌다.

2천 8백㎡에 해당하는 주택이 파괴되어 주민들이 살 집이 부족했다.

면화 생산량이 전쟁 전의 20% 수준으로 하락하고 옷을 만들 공장도 파괴되어 주민들의 의복도 부족했다.

미국은 “조선은 앞으로 100년이 걸려도 다시 일어서지 못한다”고 장담까지 하였다.

북한은 전쟁 피해를 딛고 재기에 성공할 수 있을까?

 

북한이 선택한 ‘번영의 길’

 

북한은 폐허 위에서 새롭게 출발해야 했다.

1954년부터 1956년 동안 북한 전체 예산의 23%가 사회주의 국가들의 원조로 채워질 정도였다.

– 같은 시기 한국 예산에서 외국 원조 비율은 1954년 30%, 1955년 47%, 1957년 53%이다.

 

북한은 어떻게 경제상황을 극복하고자 했을까?

일각에서는 원조 받은 자금으로 다른 나라에서 식량, 옷 등을 사들여 주민 생활부터 안정시키자고 하였다.

하지만, 당시 수상이었던 김일성 주석(이하 김일성 주석)의 고민은 달랐다.

북한의 소설 ‘번영의 길’에서는 당시 김일성 주석의 고민을 이렇게 묘사했다.

 

“사람들에게 풍족하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배를 곯지 않을만한 식량을 주고 수수한 옷감이나마 차례지게 하고 새집 한 채씩 지어준다면 당장은 더 걱정할 것이 없겠습니다. 그렇지만…. 아니, 이것으로 제 책임을 다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이것만으로는 안 되지요. (그렇게 해서는)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가난을 영영 털어버릴 수는 없습니다.”

– 박룡운, 총서 불멸의 력사 번영의 길, 문학예술종합출판사, 2001, 56쪽

 

 

김일성 주석은 전후 복구를 앞두고 당장의 굶주림을 벗어나는 데만 골몰할 게 아니라 경제 발전의 토대를 쌓아야 한다고 본 것이다.

그렇다면 김일성 주석은 어떤 선택을 했을까.

김일성 주석은 한국전쟁이 끝난 직후인 1953년 8월, ‘중공업을 우선적으로 발전시키면서 경공업과 농업을 동시에 발전’시키자고 선언했다.

– 안문석, 북한현대사산책2, 인물과 사상사, 2016, 139쪽

 

그래야 우리나라의 경제토대를 튼튼히 할 수 있고 주민생활을 빨리 개선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중공업 우선 발전, 경공업·농업 동시 발전 노선이란 예를 들면, 당장 가진 돈으로 외국에서 옷을 사서 입을 것이 아니라 옷 만드는 기계를 제작하는 데 힘을 쓰자는 정책이다.

주민들에게 외국에서 사오는 것보다는 옷을 조금 늦게 줄 수 있지만, 옷 만드는 능력을 향상하면 외국의 도움을 받지 않고도 국민에게 옷을 줄 수 있고 나라의 경제 토대도 더 튼튼해진다는 이야기이다.

김일성 주석의 전후 복구 및 경제 건설 노선은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경제 발전 방식이었다.

중국은 경공업과 농업을 발전시킨 후에 중공업을 발전시키겠다는 노선을 선택했다.

중국의 사례는 낮은 산업 단계부터 높은 산업 단계로 발전시키는 일반적인 발전 경로라고 할 수 있다.

갓 식민지에서 벗어났거나 전쟁 피해를 본 후진국들은 산업이 낙후하기 때문에 노동집약적인 산업부터 뛰어들거나 급한 대로 나라의 자원을 팔아 외국에서 식량 등을 수입했다.

한국도 1960년대 가발, 신발 등 경공업의 성장을 도모했고, 1970년대에 들어서 중화학공업 육성했다.

소련의 경우엔 중공업 발전에 집중하기 위해 경공업과 농업을 희생시켰다.

북한이 전쟁 직후부터 중공업을 우선 발전시키면서 경공업과 농업도 동시에 발전시키는 전략을 택한 것은 이례적인 국가 정책이다.

북한의 이례적인 중공업 우선 발전 노선은 어떤 결과를 낳았을까?

북한은 1954년부터 1956년까지 3년 동안 연평균 공업성장률 42%를 이루고 공업 생산을 2.8배 증가시켰다.


전쟁 전인 1949년 공업생산량의 1.8배 수준으로, 전쟁 피해 복구를 넘어 큰 폭의 성장을 이뤄낸 것이다.

국민 소득도 전쟁 전보다 146%, 1954년 대비 2.1배로 늘어났다.

북한은 경제가 발전하자 주민 생활 안정을 위한 조치를 단행했다.

북한은 1954년 2월 노동자, 기술자, 사무원의 월급을 25% 인상하고, 같은 해 3월 의료 혜택을 확대했다.

그리고 북한 정부는 네 차례에 걸쳐 물가 인하를 단행하였고, 그 결과 물가는 정전 직후보다 45% 낮아졌다.

영국 케임브리지학파의 가장 뛰어난 경제학자라고 불리는 조앤 로빈슨(Joan Robinson)은 1964년, “바로 이곳이 가난이 없는 국가라 생각된다”라며 북한의 경제 발전을 “기적”이라고 표현했다.

– 조안 로빈슨, [로빈슨 여사의 북 방문기] 케인스 수제자 로빈슨이 본 1960년대 북의 경제 – 한마디로 말하면 ‘기적’, 민족21, 2011.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