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2. 26.

 

미국은 세계패권전략의 일환으로 일찍부터 북한 붕괴전략을 추구해왔다. 이에 맞서 북한은 한반도 평화체제와 북미관계정상화를 전략적으로 주장해왔다. 미국은 80년대까지 북한의 요구를 무시하면서 군사, 경제, 외교적으로 압박하였다. 그러다 90년대 들어 북한에 핵개발 의혹이 제기되면서 미국은 북한을 무시할 수 없게 되었다. 이때부터 지금까지 북미 사이에는 치열한 핵대결이 펼쳐졌다. 


분노와 좌절, 한 가닥 기대

90년대부터 2010년대까지 미국은 북한에 대해 분노, 좌절, 기대를 품어왔다. ‘분노’란 북한이 자기들 뜻대로 끌려오지 않고 오히려 북한이 미국의 패권에 도전하며 공세를 펼친 데 대한 분노다. 사실 당시 미국은 소련을 중심으로 한 사회주의권을 붕괴시키며 세계 유일 초강대국으로 등극했기에 자기들 말을 듣지 않는 북한에게 분노를 느끼기에 충분했다. 대표적인 사건으로 98년 금창리 사건을 들 수 있다. 미국은 북한이 금창리에 비밀 핵시설을 건설한다며 공세를 펼쳤지만 결국 거액의 참관료를 ‘바쳐가며’ 들여다보고는 텅 빈 땅굴임을 확인하고 세계 면전에서 망신을 당했다. 자기 꾀에 자기가 속은 셈이다. 

‘좌절’이란 북한을 붕괴시키기 위해 전쟁을 준비했으나 끝내 시행하지 못하면서 겪은 좌절을 말한다. 1993년 클린턴 미 정부가 북미합의를 파기하고 팀스피리트 한미연합훈련을 재개하자 북한이 핵확산금지조약(NPT)을 탈퇴하였다. 이에 미 군부는 북한을 공격하기 위해 컴퓨터를 가동하여 전쟁 시뮬레이션을 하였다. 그 결과는 참혹하였다. 전쟁 개시 초기에 주한미군의 80%와 주일미군 46%가 전멸하며 수개월간 계속되는 전쟁에 6척의 항공모함, 50만 병력을 동원해야 하고 희생자는 수십만 명에 달한다고 하였다. 이것은 북한에 핵무기가 없다는 가정 아래 계산한 수치다. 그 후로도 몇 차례 미국의 전쟁 시뮬레이션 결과가 부분적으로 공개됐는데 갈수록 피해 규모가 커졌다. 미국이 전쟁을 결단하지 못하고 좌절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기대’란 미국이 시간을 끌면서 내부 붕괴를 유도해 북한의 급변사태를 기대하는 것이다. 전쟁 위협, 경제 봉쇄와 함께 자본주의 ‘황색 바람’을 북한 내부에 끊임없이 불어넣으면 결국 북한이 내부에서 무너질 것이라는 계산이다. 미국은 이를 위해 막대한 예산을 들여 북한을 상대로 라디오 방송, 대북전단 살포, 테러집단 투입을 해왔다. 미국은 사회주의 국가들, 반미 국가들에 즐겨 써온 이런 방식으로 소련과 동구권을 붕괴시킨 경험이 있다. 하지만 하세월이었다. 

공포와 좌절, 그리고 혼돈

2010년대 들어 미국의 분노, 좌절, 기대는 점차 공포, 좌절, 혼돈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결정적으로 북한이 핵무력 완성을 선언한 2017년부터 미국의 대북인식은 확고히 전환되었다. 

북한이 미국 본토를 핵무기로 공격할 수 있다는 게 확인되면서 미국은 공포에 빠졌다. 미국의 민간기구들은 핵전쟁 발발 시 뉴욕에서만 1백만 명, 워싱턴 D.C.에서는 30만 명, 서울과 도쿄에서만 2백만 명 이상이 사망한다고 추정했다. 하와이에서는 공습 오보가 발령되는 바람에 주민과 관광객들이 하루 종일 공포에 떠는 사건까지 발생했다. 그동안 북한과 전쟁을 하더라도 미국 본토는 안전할거라는 믿음은 완전히 사라졌다. 

2017년 사상 최대의 대북제재로 북한을 완전히 말려죽이겠다는 미국의 의도 역시 좌절로 끝났다. 북한은 경제건설-핵무력건설 병진노선으로 핵무력 완성과 함께 경제건설에서도 놀랄만한 성장을 이뤘다. 핵개발은 막지 못하더라도 경제는 확실히 붕괴시킬 수 있다는 미국의 바람은 한 여름 밤의 꿈으로 끝나버렸다. 미국의 정책 입안자들은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 

전쟁도, 봉쇄도 통하지 않는 속에서 미국의 대북정책은 갈팡질팡 혼돈에 빠지고 말았다. 미국이 생각할 수 있는 대북정책이란 대결, 대화, 무시(전략적 인내) 세 가지뿐이다. 혹시 세 가지 범주에 들어가지 않는 정책이 있다면 알려주기 바란다. 미국은 이 세 가지 정책을 모두 밀고나가면서 상황에 따라 셋 중 하나를 주된 정책으로 내민다. 

그간 미국은 수십 년에 걸쳐 대결과 대화를 오가며 답을 찾다가 결국 둘 다 실패하였고 오바마 정부는 전략적 인내라는 자포자기 상태에 빠져버렸다. 오바마 정부의 전략적 인내는 ‘무시’ 전략이라기보다 꿩이 천적을 피해 수풀에 대가리를 처박는 행위에 가깝다. 자신에게 닥쳐올 위험을 피할 길이 없으니 그냥 눈을 감아 안 보겠다는 것이다. 

모든 것이 물거품으로

그런데 트럼프 정부는 과거 정권의 실패에서 교훈을 찾지 못하고 다시 대결을 시도했다. 왜인가.

지금의 북미관계를 트럼프 대통령의 개인 특성에서 찾는 경우가 많은데 사실 트럼프 대통령이 집권하지 않고 힐러리가 집권했어도 결과는 크게 바뀌지 않았을 것이다. 오바마 정권의 무책임한 전략적 인내 기간 북한은 핵무력 완성 단계에 이르렀고 자신들의 힘을 미국에게 확실히 보여주었다.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부터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수소폭탄까지 다양한 종류의 전략무기들이 속속 등장하며 미국 본토를 위협하는 마당에 누가 집권하든 전략적 인내정책을 유지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트럼프 정부는 일단 전쟁불사를 외치며 항공모함도 투입해보고 전략폭격기들도 보내 북한을 위협하였다. 그러나 미국 본토가 위협받는 상황에서 그런 위협은 통하지 않았다. 그 정도 위협은 북한이 핵개발을 하기 전부터 계속 받아왔던 것이다. 북한은 새로운 전략무기를 선보였으나 미국은 그에 맞는 새로운 뭔가를 보여줄 수 없었다. 결국 트럼프 대통령은 “내 핵단추가 더 크다”는 말을 남기고 대결을 중단했다. 

올해 들어 트럼프 정부는 대화에 나섰다. 하지만 미국은 한반도 평화체제 수립과 북미관계 정상화보다는 딴 생각을 하였다. 대규모 경제 지원을 미끼로 북한을 ‘개혁·개방’으로 이끌어내고 자기편으로 만들어 중국 봉쇄망에 편입시키자는 것이었다. 폼페이오 국무장관은 뉴욕을 찾은 김영철 부위원장에게 멋진 스카이라인을 보여주며 유혹하였다. 그러나 어쩌랴. 무질서한 뉴욕의 스카이라인보다 조화로운 평양의 려명거리 스카이라인이 더 멋진걸. 

결국 트럼프 대통령이 직접 나서 정상회담을 하면서 김정은 위원장에게 영상을 하나 보여주었다. 미국 편이 되면 엄청난 경제지원을 하겠지만 거부한다면 어려움에 처할 것이라는 유혹과 위협이 섞인 내용이었다. 아, 이것 역시 이명박 정권이 ‘비핵·개방·3000’이라는 이름으로 이미 북한에 들이밀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이명박 대통령은 지금 서울동부구치소에서 인생 말년을 보내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보여준 영상은 북한을 전혀 흔들 수 없었다. 

중국에 대한 노림수는 더 노골적으로 파탄 났다. 북미정상회담을 하기 전에 이미 북중정상회담을 통해 사상 최고의 북중관계를 선언한 것이다. 바로 전년도까지 신경전을 벌이던 모습은 미국을 낚기 위한 미끼였던 것일까? 자신이 속았다는 걸 깨달은 트럼프 대통령은 북중정상회담에 대해 노골적으로 불쾌감을 드러내며 북미정상회담을 무기한 연기해버렸다. 그래봐야 며칠 못 가 다시 대화의 자리에 복귀하긴 했지만. 어찌 보면 어린아이가 자기 뜻대로 안 되니 떼를 쓰는 것 같기도 하고.

대화를 통해 얻어 보려 했던 미국의 구상도 모두 물거품이 되었다. 미국은 다시 전략적 인내로 돌아갔다. 하지만 이것 역시 오래 갈 수 없는 운명이다. 오바마 정부의 전략적 인내가 북한의 공세로 무너졌듯, 트럼프 정부의 전략적 인내 역시 북한의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공세 앞에 무너질 수밖에 없다. 미국도 이를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할 수 있는 게 없을 뿐. 

미국에게 열린 두 가지 길

대결, 대화, 전략적 인내라는 세 가지 대북정책 모두 통하지 않는 상황에서 미국은 혼돈에 빠져버렸다. 지금 트럼프 정부는 전략적 인내를 기본으로 하면서 대결을 극구 피하고 어떻게든 자기 구도대로 대화를 만들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트럼프 정부가 비핵화 없이는 제재 해제도 없다고 반복하는 것은 전략적 인내를 하겠다는 의미다. 존 볼턴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보좌관이 4일(현지 시각) 워싱턴의 한 토론회에서 2차 북미정상회담을 해야 한다면서 “트럼프 대통령은 북한을 위해 문을 열어놓았고 북한이 거기로 들어와야 한다”고 한 것은 자기 구도대로 대화를 하고 싶다는 뜻이다. 하지만 북한이 공개적으로 병진노선 복귀, 즉 핵개발 재개를 경고했음에도 군사적 대응 등 강경하게 대응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대결을 회피하겠다는 의미다. 

미국은 지금 질서 정연하게 자기 구도를 가지고 대북정책을 펴기보다 북한의 공세에 밀리면서 모든 게 꼬여버린 형국이다. 자기 구상은 모두 파탄 났고 무질서와 혼돈에 빠져 시간 끌기에 나서고 있다. 사람이 공포와 좌절, 혼돈에 빠지면 일시적 공황장애가 나타나기도 하며 뇌출혈을 일으키거나 장기적으로는 암에 걸리거나 폐인 상태가 된다. 나라가 공포와 좌절, 혼돈에 빠지면 내분이 일어나고 자기들끼리 격돌하고 붕괴한다. 대외적으로는 이성을 잃고 무모한 행위에 나설 수도 있다. 

대 혼돈이 휩쓸고 지나가면 언젠가 새로운 질서가 들어서게 되어 있다. 지금 미국에게는 두 가지 길이 있다. 북미관계를 정상화하고 공존·공영·공리를 추구하는 정상국가가 되느냐 아니면 자멸하거나 무모한 전쟁에 나섰다가 참혹한 결과를 맞느냐. 미국은 어느 길로 갈 것인가.

문경환 주권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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