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2. 26.

트럼프 대북대응책은 전략적 인내와 달라

 

빠르게 발전할 것 같던 북미관계가 정체되었다. 북한의 선제적 비핵화 조치에 대해 미국이 종전선언이나 제재완화 약속을 지키지 않고 오히려 북한에 추가적 비핵화 조치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이에 미국 내에서조차 정체된 북미관계의 원인이 미국에게 있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이런 미국의 대북정책을 두고 ‘트럼프식 전략적 인내’ 혹은 ‘속도조절론’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현재 미국의 대북정책의 본질과 성격을 놓고 볼 때 이런 이름은 정확하지 않고 오히려 오해를 부를 수 있다. 

일단 ‘속도조절론’이란 표현은 미국이 한반도 비핵화와 북미관계 정상화라는 목표를 향해 나아가기는 하지만 그 속도가 너무 빨라 조절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하지만 미국은 현재 한반도 비핵화와 북미관계 정상화를 향해 나아갈 생각이 없다. 미국은 한반도 비핵화를 은근슬쩍 북핵폐기로 바꿔 부른다. 한반도 비핵화를 하려면 미국이 대북 핵위협을 중단해야 하는데 그럴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북미관계 정상화 역시 평화협정 체결이 필요하고 주한미군을 철수해야 하므로 미국의 기피 대상이다. 즉, 미국은 ‘속도조절’을 하는 게 아니라 아예 나아갈 생각 자체가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마치 북한이 너무 서둘러서 미국이 차분하게 상황을 조절한다는 인상을 주는 ‘속도조절론’은 정확한 표현이 아니다. 

그렇다면 ‘트럼프식 전략적 인내’는 어떤가? 이 표현은 일단 트럼프 정부의 대북정책이 오바마 정부가 추진하던 ‘전략적 인내’의 연장선이며 본질과 성격은 같지만 전술적 변화만 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러나 이 역시 지금 미국 정부의 대북정책을 정확히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 

 

미국의 대북 대응 양태는 현상유지책

일단 ‘트럼프식 전략적 인내’는 오바마 정부의 ‘전략적 인내’ 정책이 왜 파산했는지를 정확히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나오는 표현이다. 오바마 정부는 이전 미국 정부들이 북한과 대결도 해보고 대화도 해봤지만 모두 성과를 내지 못하고 오히려 북한에게 밀리기만 하는 모습을 보았다. 그리고 자신도 집권 초기에 대결과 대화를 시도했다가 똑같은 꼴을 당하고 말았다. 그래서 겉으로는 북한의 대화 요구나 군사 행동에 직접 대응을 최대한 자제하면서 속으로 북한 내부를 붕괴시키기 위한 각종 공작에 매달렸다. 경제봉쇄는 기본이며 테러, 민심 교란, 한국과 일본 등 주변국을 통한 북한 자극, 북중 관계 이간질 등 다양한 방식을 동원했다. 북한에 불을 지르기 위해 내부에 계속 불씨를 던진 꼴이다. ‘전략적 인내’ 정책은 명칭과 달리 겉으로는 ‘인내’하는 척 하면서 속으로는 온갖 대북적대정책을 펼친 것이었다. 

그러나 미국의 의도는 통하지 않았고 북한의 핵무력 강화로 인하여 더 이상 북한을 무시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미국 내에서조차 전략적 인내로 인해 북한이 핵무력을 강화했다며 불만의 터져 나왔다. 북한 내부에 불이 난 게 아니라 거꾸로 미국 집 앞에 불이 난 셈이다. 미국은 집에 불이 옮겨 붙기 전에 북한에게 그만 불을 지르라며 서둘러 대화에 나서야 했다. 미국에 정권교체가 없었다 해도, 트럼프 정부가 들어서지 않았다고 해도 ‘전략적 인내’ 정책은 더 이상 유지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제 와서 미국이 다시 ‘전략적 인내’ 정책을 꺼내들었다는 주장은 이런 배경을 전혀 이해하지 못해서 나오는 소리다. 

지금 미국 정부의 대북 대응 양태는 ‘현상유지책’이라고 부를 수 있다. 당장 집에 불이 옮겨 붙지 못하게 하기 위해 불길을 막는데 급급해 우왕좌왕하며 내놓는 것이라 ‘정책’이라고 하기조차 민망하다. 일단 미국은 북한이 핵·미사일 활동을 중단하고, 북한이 요구하는 종전선언, 제재해제는 하지 않으며 대북제재는 유지되는 지금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 그래서 현상유지책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현상유지책과 전략적 인내 정책은 나타나는 모습에서 큰 차이가 있다. 전략적 인내는 대화를 전혀 하지 않고 군사적 압박을 가하는데 반해 현상유지책은 대화를 진행하면서 군사적 압박은 최대한 자제한다. 미군이 북한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한미연합훈련의 명칭에서 ‘연합’을 빼고, 훈련 규모 축소와 언론보도 자제를 하겠다고 나오는 게 대표적인 모습이다. 심지어 이미 일부 한미연합훈련을 한반도 밖에서 진행하고 있다. 이는 미국이 그만큼 수세에 몰려있기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일관성의 법칙을 이용한 전형적인 사기꾼 행태

지금 미국의 태도에서 가장 심각한 문제로 지적받는 부분은 사기꾼 수법을 쓰는 것이다. 미국은 일단 합의를 하고서는 자기는 약속을 지키지 않고 상대에게만 약속에도 없는 사항을 추가로 요구하는 전형적인 사기꾼 태도를 보이고 있다. 미국은 북한이 이미 비핵화 조치를 했음에도 조금 더 하면 종전선언도 하고 제재해제도 할 것처럼 설득하고 있다. 미국의 이런 행태는 사실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미국의 심리학 이론과 행동경제학 이론은 기업의 영업 기법부터 협상, 심지어 정부 정책에도 영향을 준다. 2008년에 나온 행동경제학 서적 ‘넛지’(Nudge)는 오바마 대통령의 정책 결정에 큰 영향을 줬다고 알려지면서 세계적 유행어가 되기도 했다. 이들 이론 가운데 일관성의 법칙이라는 게 있는데 사람은 한 번 어떤 결정을 하면 그 결정에 일관성을 유지하기 위해 자신의 생각을 합리화하려는 경향이 있다는 이론이다. 

이걸 응용한 전략으로 ‘문전걸치기 전략’(the foot in the door technique)이 있다. 닫으려는 문에 일단 발을 넣으면 상대가 문을 닫지 못한다는 뜻이다. 경영기법에서 이 전략은 기업에게 마음의 문을 닫으려는 고객에게 작은 부탁을 하고 그것을 시작으로 마음의 문을 조금씩 열어가는 전략이다. 일관성을 유지하려는 심리를 이용한 것이다. 일단 작은 부탁을 들어주었다면 그것을 유지하고 싶기 때문에 처음에 부탁하면 들어주지 않았을 무리한 부탁도 들어주게 된다.

이것은 실제 투자 사기에서도 흔히 나타나는 현상인데 일단 누군가에게 투자를 받아내고 나면 나중에 ‘지금 투자금을 회수하는 것보다 차라리 조금 더 투자하면 나중에 훨씬 크게 돌려받을 수 있다’는 식으로 설득해 계속해서 투자를 받아내는 사례가 많다. 사기를 당하는 측에서는 투자금이 아깝기도 하고 투자를 한 자신의 판단이 옳았다고 믿고 싶기에 계속해서 투자 규모를 늘리게 마련이다. 

느닷없는 심리학 얘기를 꺼낸 것은 미국이 다른 나라를 대상으로 저런 식의 사기를 많이 쳤기 때문이다. 대량살상무기만 폐기하면, 개혁개방만 하면, 사찰만 허용하면 경제 지원을 해주겠다는 식으로 속이고 정작 경제 지원은 하지도 않으면서 점점 더 많은 요구를 해서 결국 상대국을 무너뜨린다. 리비아의 카다피가 유엔 총회장에서 이런 미국의 행태에 속았다고 규탄했지만 끝내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하고 리비아는 붕괴하고 말았다. 

미국은 북한에 대해서도 ‘조금만 더 비핵화하면 약속했던 종전선언, 제재해제 하겠다’는 식으로 설득하면 북한이 이미 해버린 비핵화 조치가 아까워서라도 조금 더 비핵화를 할 것으로 여길지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 북한의 태도는 단호하다. 자신들은 미국이 약속을 지키기 전까지 더 이상의 비핵화 조치를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아무튼 전략적 인내 정책에서는 대화와 협상 자체가 거의 없어서 볼 수 없었지만 미국의 이런 사기꾼 행태는 오래 전부터 지속되어 온, 그리고 세계 여러 나라에 보여 온 모습이다.

전략적 패퇴 시기에는 혼선이 불가피

전략적 인내 정책은 북한 붕괴라는 목표와 기대를 가지고 갖가지 공작을 적극 추진하였다. 그러나 현상유지책은 목표와 전망 없이 속수무책으로 ‘전략적 패퇴’의 모습을 뚜렷이 보여주고 있다. 북한의 핵위협에 공포를 느끼며 안보 위협 해소에 집중하는 방어적 성격으로 밀려난 것이 현상유지책이다. 그런데 방어선을 지키며 현상유지라도 하면 다행이겠지만 현실은 후퇴의 연속이다. 

9월 평양정상회담 이후 미국의 후퇴는 뚜렷이 나타나고 있다. 9월 남북공동선언을 본 미국은 처음에 발끈했으나 당장 이를 뒤집었다가 더 큰 공세에 직면한다는 것을 깨닫고는 남북군사합의들을 인정했고, 대북제재 위반이라고 떠들던 남북공동연락사무소도 인정했다. 19일 한미워킹그룹 회의차 입국한 스티븐 비건 미 국무부 대북정책특별대표는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하자마자 기자들을 불러 모아 성명을 낭독했다. 대북 인도적 지원과 미국인 북한 여행 금지 재검토를 할 수 있다며 북한에 미소를 보낸 것이다. 한미워킹그룹에서는 철도, 도로 연결사업 착공식도 승인했다. 이를 두고 김현욱 국립외교원 교수는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신년사에 담길 대미 메시지에 영향을 주기 위한” 의도로 풀이했다. 

미국의 거듭된 대화 요구, 비핵화 압박을 무시하고 있는 북한에게 미국이 이런 저자세를 보이는 것이 의외라는 인상을 준다. 그간 강경발언을 이어오던 존 볼턴 백악관 안보보좌관도 입을 다물었고 매티스 국방장관은 아예 사퇴해버렸다. 중국, 러시아를 향해서도 초강경 압박을 이어가는 미국이 북한을 상대로 보이는 이런 저자세 태도를 새로운 질서가 만들어지는 과정으로 인식하기도 한다. 

전략적 패퇴 시기에는 대열정비도 어렵고 정책혼선도 불가피하다. 패색이 짙은 정부에서 책임자를 자주 교체하는 것은 일반적인 상황이다. 일본도 2차 세계대전 막바지에 총리가 임기를 1년도 채우지 못하고 계속 바뀌었다. 지난 11월 미 중앙정보국 코리아임무센터의 책임자 앤드루 김이 취임 1년 반 만에 사임하고 최근 매티스 국방장관이 사임한 것도 비슷한 현상이다.

이처럼 현상유지책은 전략적 인내와 본질과 성격이 분명히 다른 개념이다. 다른 개념이라면 그 운명도 다를 것이다. 전략적 인내는 나름 긴 수명을 가지고 있었다. 2010년 5월 처음 언급된 전략적 인내는 2016년까지 6년가량 이어졌다. 그러나 현상유지책은 오래갈 수 없다. 미국이 북한의 말 한 마디에도 전전긍긍하고 신년사에 뭐가 실릴지 촉각을 곤두세우는 불안정한 상황을 계속 유지할 수는 없는 것이다. 

현상유지책이 파산하면 미국에게 다른 대안이 있을까? 미국이 결국 한반도 비핵화와 북미관계정상화, 평화체제 수립의 길로 나서면 대북적대정책은 당연히 유지할 수 없고 남북의 자주통일도 막을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한국에 대한 지긋지긋한 승인정책 역시 사라지고 말 것이다. 

문경환 주권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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