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4. 12.

북한은 올해 1월 조선노동당 제8기 제6차 중앙위원회 정치국 회의에서 김일성 주석 탄생 110돌과 김정일 국방위원장 탄생 80돌을 “승리와 영광의 대축전”으로 “성대히 경축”하겠다고 하였다. 통일의 상대방인 북한이 국가 차원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계기에 대해 우리도 학술적으로 자세히 연구하는 게 통일을 앞당기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이에 주권연구소와 자주시보는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에 대한 기획연재를 10회에 걸쳐 준비하였다. 

 

 


 

 

 

 

 

7.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핵, 미사일 개발과 외교 

 

 

(1) 김정일 국방위원장 시기 북한의 대외 환경

1990년대 들어 북한의 대외 환경은 극도로 나빠진다. 동구권 사회주의 국가들이 붕괴하였고 소련은 해체됐으며 중국은 시장경제체제를 도입하는 등 북한이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교류·협력하던 사회주의 국가들이 대거 돌아선 것이다. 이를 기회로 미국은 북한에 압박을 집중하였다. 이 시기 미국의 공세는 북한의 ‘핵개발’을 명분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과거와 달랐다. 

북한과 미국은 전쟁 접경까지 가는 치열한 대결을 펼치다 마침내 1994년 10월 21일 북미 제네바 합의를 발표하였다. 제네바 합의는 한반도 비핵화와 대북 에너지 지원, 북미관계 정상화와 한반도 평화 등의 내용을 담고 있어 위기에 처한 한반도 문제를 해결할 중요한 합의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북한은 제네바 합의 전후로 김일성 주석의 서거와 연이은 대규모 자연재해로 이른바 ‘고난의 행군’에 들어가야 했다. 미국은 이를 기회로 제네바 합의를 무시하고 다시 북한에 강한 압박을 가하였다. 

당시 사회주의권의 몰락과 미국과 미국의 동맹국들의 포위에서 과연 북한이 살아남을 수 있겠는가라는 질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부정적인 전망을 내놓았다. 전 세계는 사회주의 체제는 물론 북한이라는 나라를 유지하느냐 못 하느냐 하는 절체절명의 위기 앞에 선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선택을 주목하였다. 

(2) 김정일 국방위원장 시기 북미 대결

금창리 사건과 인공위성 ‘광명성1호’

1994년 7월 8일 김일성 주석이 서거하였지만 북한은 미국과 협상을 중단하지 않았고 10월 21일 북미 제네바 합의를 이끌어냈다. 이를 통해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그동안의 북미 대결에 깊이 관여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따라서 김정일 시대라고 해서 북한의 대미 정책이 특별히 변화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1996년 2월 담화에서 “나에게서 그 어떤 변화를 바라지 말라”라고 한 말은 이를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한편 미국은 북미관계를 정상화할 생각이 애초에 없었다. 미국은 북한을 공존의 대상으로 여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국은 경제봉쇄를 통해 북한을 내부부터 붕괴시킬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 당시 미국에는 빠르면 3일 이내, 혹은 3개월 이내, 늦어도 3년 이내에 북한이 붕괴한다는 이른바 3-3-3 가설이 떠돌았다. 이처럼 미국은 앉아서 기다리면 북한이 붕괴하리라 여겼기에 미국에 불리한 제네바 합의를 지킬 생각도 없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선군정치’라는 독특한 정치방식으로 불리한 환경을 극복하고 1998년 ‘고난의 행군’을 공식적으로 마감했다. (이와 관련한 자세한 내용은 본 기획연재 9편 「선군정치로 ‘고난의 행군’을 돌파하다」 참고) 이 시기에 미국은 ‘금창리 사건’으로 북한을 압박하였다. 금창리 사건의 전말은 다음과 같다. 

1998년 8월 초, 미국은 인공위성 사진을 근거로 북한의 금창리에 지하핵시설이 있다고 주장하면서 사찰을 요구했다. 북한은 핵시설이 아니라며 사찰을 거부하면서 대신 3억 달러의 참관료를 내고 구경하는 건 허용하겠다고 했다. 미국은 사찰에 보상은 있을 수 없다고 맞섰다. 백악관은 제네바 합의에 불만이 가득했던 의회의 강경 분위기를 의식해야 했다. 자칫 ‘제네바 합의 유지를 위해 금창리 의혹을 돈을 주고 무마했다’는 공격을 받을 경우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클린턴 정부는 위기에 몰려있었다. 북미 양측이 팽팽히 맞선 가운데 회담은 공전을 거듭했고 해법은 보이지 않았다. 한반도는 다시 전쟁 위기에 휩싸였다. (박두식, 「금창리협상 타결 되기까지」, 조선일보, 1999.3.17.)

그러자 8월 31일 북한은 인공위성 ‘광명성 1호’를 다단계로켓에 실어 발사하였다. 미국이 도발적인 미사일 발사 훈련이라며 목소리를 높일 때 러시아가 처음으로 인공위성임을 확인하였다. 미항공우주국(나사)도 인공위성 발사 성공을 인정했다. 북한은 단 한 번에 인공위성 발사를 성공시켜 자신의 과학기술수준을 과시하였고 동시에 미국 본토를 공격할 수 있는 군사력이 있음을 보여주었다. 인공위성 발사로켓을 만드는 기술력이면 대륙간탄도미사일도 만들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미국은 북한이 2~3년 안에 대륙간탄도미사일을 개발할 것이 확실하다고 보았다. (길정우, 「[북.미협상 타결] ‘금창리 핵의혹 조사’ 합의 의미」, 중앙일보, 1999.3.18.)

전쟁이 나면 본토가 공격당할 수 있는 상황이 되자 미국은 협상을 빨리 마무리 지으려 했다. 1999년 2월 27일 시작된 북미 금창리 4차 회담에서 미국은 3억 달러어치의 식량을 참관료로 지불하고 문제의 ‘금창리 지하시설’을 구경하기로 합의하였다. 합의문에는 사찰(inspection) 대신 접근(access)이라고 명시했다. 미국 내에서는 북한의 외교술에 미국이 또다시 당한 것 아니냐는 불만이 터져 나왔다. (홍은택, 「[北-美협상 사실상 타결] 北 ‘벼랑끝 외교’ 판정승」, 동아일보, 1999.3.13.)

당시 백악관은 내심 금창리 지하시설에 핵 활동 흔적이 없기를 바랐다고 한다. 만약 핵시설임이 확인되면 클린턴 정부가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으로 번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길정우, 앞의 글) 

미국의 바람대로 금창리 지하시설은 아무것도 없는 텅 빈 땅굴이었다. 미국은 이 정체불명의 지하시설을 만드는 데 10년 이상 걸렸을 것으로 추정했고 규모나 형태, 시설을 볼 때 어떤 용도인지 전혀 짐작할 수 없는 수수께끼라고 털어놓았다. 심지어 식량을 받아내려는 북한의 미끼라는 지적까지 나왔다. 미 국무부의 모습은 그리스군이 남겨놓은 목마를 바라보며 어리둥절하는 트로이군의 모습과 비슷했다. (김종수, 「‘北 금창리 왜 지었을까’ 美서도 알쏭달쏭」, 중앙일보, 1999.7.13.)

참관단을 이끌었던 조엘 위트 국무부 북한 담당관은 “미국의 한 정보기관이 금창리 동굴에 핵시설이 있다는 잘못된 정보를 언론에 흘려 문제를 자초했다”라며 “내가 당시 10명의 검증팀을 이끌고 동굴들을 뒤졌으나 아무것도 없었다”라고 분개했다. (박현, 「“과거 대북협상으로 한·미 실제로 이익봤다”」, 한겨레, 2013.6.4.)

이 일을 계기로 클린턴은 1999년 5월 25일 전 국방부 장관 윌리엄 페리를 특사로 임명하고 방북시켰다. 그 후 페리 특사는 북한이 결코 붕괴하지 않으며 미국은 적대 정책을 철회하고 대화에 나서야 한다는 ‘페리보고서’를 작성하였다. 이런 미국의 대북정책 변화에 따라 2000년 10월 9~12일 조명록 국방위원회 1부위원장이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특사 자격으로 미국을 방문, 클린턴 대통령과 만나 북미관계 정상화와 클린턴 대통령의 방북 등의 내용을 담은 북미공동코뮤니케를 발표하였다. 

6자 회담과 1차 핵시험

클린턴의 방북 약속은 미국 대선에서 공화당 부시가 승리하면서 휴지조각이 되었다. 부시 대통령은 2002년 연두교서를 통해 북한을 ‘악의 축’으로 규정하였으며 3월에는 ‘핵태세검토보고서’를 통해 북한을 핵 선제공격대상국으로 명시하였다. 나아가 10월 3일 북한에 들어간 제임스 켈리 미 국무부 동아태담당 차관보는 북한이 농축우라늄 개발 계획을 시인했다고 주장하면서 사태를 키웠다. 북한은 시인한 적이 없다고 반박했다. 하지만 미국은 11월 14일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케도) 집행 이사회를 열고 12월분 중유 공급을 중단하였다. 본격적으로 북미 제네바 합의를 폐기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에 맞서 북한은 12월 12일 외무성대변인 담화를 통해 ‘핵시설들의 가동과 건설을 즉시 재개’한다는 입장을 천명했다. 이듬해 1월 10일에는 NPT 즉각 탈퇴와 미사일 발사 시험 재개를 선언하였다. 

북한의 핵활동을 막아야 했던 미국은 결국 중국의 중재로 북미 협상을 하는 ‘3자 회담’에 합의하였고 이어 2003년 8월 북한, 미국, 한국, 중국, 러시아, 일본이 참가하는 6자 회담 개최를 합의하기에 이른다. 물론 미국은 협상에 관심이 없었다. 6자 회담은 그저 북한을 압박하고 전쟁 준비를 다그치기 위한 시간 벌기에 지나지 않았다. 미국은 북한의 핵무기 계획을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되돌릴 수 없게 제거하자는 이른바 CVID 방침을 선언하면서 심지어 평화적 핵발전조차 금지하겠다는 억지를 부렸다. 

지지부진한 6자 회담이 이어지며 미국의 군사적, 외교적, 경제적 압박이 가중되자 북한은 2005년 2월 10일, 외무성 대변인 성명을 통해 ‘핵보유선언’을 하였다. 이제 북미 대결은 동등한 핵보유국의 대결이라는 새로운 국면으로 전환되었다. 

결국 미국은 6자 회담에 복귀했고 2005년 9월 19일 9.19 공동성명에 합의했다. 그러나 미국은 굴욕을 만회하기 위해 바로 다음날인 9월 20일 마카오 방코델타아시아(아래 BDA)에 있는 북한 계좌를 동결시키는 이른바 BDA 사태를 일으켰다. 더 이상 핵문제로 이겨볼 수 없자 미국은 위조지폐라는 새로운 빌미를 만들어 9.19 공동성명을 휴지조각으로 만든 것이다. 

이에 맞서 북한은 이듬해 7월 5일 새벽(미국 시각으로 독립기념일인 7월 4일 오후)에 무더기 미사일 발사 훈련을 하였고 10월 9일 최초의 핵시험을 강행하였다. 북한 외무성 대변인은 핵시험 성공 이틀 후 담화문을 내고 “미국에 의해 날로 증대되는 전쟁위험을 막고 나라의 자주권과 생존권을 지키기 위해 부득불 핵무기 보유를 실물로 증명해 보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라고 밝혔다. 국제사회는 부시 정부가 북한과 대화를 거부해서 북한이 핵보유국이 됐으며 계속 대화를 거부하면 북한에 더 많은 핵무기를 개발할 기회만 주는 꼴이라는 비난을 쏟아냈다. 

북한이 핵무기를 실물로 보여주자 미국은 겉으로 유엔 제재를 한다, 봉쇄를 한다 부산을 떨었지만 뒤로는 반대 행보를 걸었다. 부시 대통령은 2006년 11월 18일 아시아 태평양 경제협력체(아펙) 회의에서 있었던 한미정상회담 자리에서 종전선언을 하고 싶다고 발언하였다. 북미 양자 회담은 하지 않겠다던 미국이 2007년 초에는 베를린에서 양자 회담을 진행하였다. 결국 2007년 2월 5차 6자 회담 3단계 회의 결과 ‘9.19 공동성명 이행을 위한 초기조치’ 합의문(2.13 합의)이 나왔으며 10월에는 6차 6자 회담 2단계 회의 결과 ‘9.19 공동성명 이행을 위한 제2단계 조치’ 합의문(10.3 합의)이 나왔다. 이에 따라 미국은 테러지원국 목록에서 북한을 삭제하는 등 적대 정책을 단계적으로 폐지하기 시작했다. 

미국과 한국의 ‘반북세력’들은 패배감에 빠졌다. 워싱턴포스트지는 2008년 10월 12일 자 보도에서 “테러지원국 해제에 비판적인 사람들은 부시 행정부가 북한 지도자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전형적인 벼랑 끝 전술에 굴복했다고 말하고 있다”라고 했다. 친미보수 논객인 조갑제도 “정신적 공황에 빠졌다”라며 미국과 이명박 정부를 비난했다. 심지어 딕 체니 당시 부통령조차 화가 나서 외교전문가들과의 약속을 취소하면서 “나는 이 결정을 내리는 데 있지 않았다. 이번 조치에 대한 당신들의 관심을 국무부에 이야기 해달라”라는 말을 남기고 집무실을 나가버렸다고 한다. 

전략적 인내와 핵무력 강화

2009년 1월 20일 오바마 대통령이 취임했다. 그간 미국은 북한과 협상도 해보고 대결도 해보았지만 민주당 정권이든, 공화당 정권이든 아무런 ‘성과’도 내지 못했다. 물론 여기서 ‘성과’란 미국 입장에서 말하는 것으로 북한의 핵무기 개발을 저지하고 북한 체제를 무너뜨리는 것을 의미한다. 이제 오바마 정권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협상도, 대결도 소극적으로 대하면서 시간을 끄는 ‘전략적 인내’였다. 물론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오바마 정권은 경제제재를 강화하면서 북한을 내부에서 붕괴시키는 이른바 ‘급변사태’를 유도하기 위해 온갖 공작을 시도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런 계획도 ‘성과’를 내지 못했다. 

오바마 정권 출범 직후인 2009년 4월 5일, 북한은 인공위성을 발사하였다. 그러자 오바마 정권은 곧바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를 소집하여 4월 5일 발사를 규탄한다는 내용의 의장 성명을 발표하였다. 흥미로운 것은 의장 성명 내용에 북한이 무엇을 발사했는지 명시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저 ‘북한의 4월 5일 발사를 규탄’한다고만 하였다. 인공위성 발사를 규탄하자니 명분이 서지 않고, 미사일이라고 하자니 전 세계가 인공위성이라고 인정하고, 그래서 해괴한 성명이 탄생한 것이다. 

북한은 곧바로 외무성 성명을 통해 6자 회담이 자신의 주권을 침해하고 제도 전복을 노리는 기구가 되었다면서 “다시는 절대로 참가하지 않을 것”이며 “6자 회담의 그 어떤 합의에도 더 이상 구속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또 핵시설 원상복구, 폐연료봉 재처리, 2차 핵시험, 자체 경수로 건설과 우라늄농축프로그램 개발 등을 선언하였다. 

그리고 5월 25일 2차 핵시험을 실시하였다. 북한의 신속한 행보에 놀란 미국은 8월 4일 클린턴 전 대통령을 전격 방북시켜 양자대화의 물꼬를 열었다. 그리고 12월 8일에는 스티븐 보즈워스 미 국무부 대북정책 특별대표를 방북시켜 평화협정 체결에 대한 논의를 진행하였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오바마 정권의 ‘전략적 인내’ 정책에 따라 북미 사이에는 더 이상의 관계 발전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이 기간을 그저 수동적으로 보내지 않았다. 북한은 이 기간을 국방력 강화와 경제발전의 토대를 닦는 기회로 삼았다. 2016년 6월 20일, 몽골 울란바토르에서 열린 안보회의에 참석한 북한의 외무성 관료가 “힐러리의 전략적 인내 정책이 북한으로 하여금 핵억지력을 가질 수 있게 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박의명, 「北 외무성 관료, “힐러리의 ‘전략적 인내’, 핵개발 가능케해”」, 매일경제, 2016.6.22.)

이러한 평가는 한국과 미국에서도 나온다. 

정한범 국방대학교 교수는 「오바마정부 말기 전략적 인내 정책의 변화」(『한국정치외교사논총』 39권, 한국정치외교사학회, 2017.)에서 “오바마 행정부의 ‘전략적 인내’ 정책은 재임기간 동안 북한의 비핵화 선언을 전제 조건으로 대화를 단절함으로써 실제로는 북한이 외부의 아무런 간섭도 받지 않고 편안하게 핵/미사일을 개발할 수 있는 시간을 벌 수 있게 해 주었다는 비판을 받는다”라고 주장했다. 

2016년 1월 6일, 북한 4차 핵시험 직후, 미국 공화당은 물론 민주당에서조차 “2009년 도입한 전략적 인내 정책으로 오히려 북한에게 핵과 미사일 능력을 개발하는 시간만 벌어주는 결과를 초래했다”라는 비난이 쇄도했다. 마르코 루비오(플로리다) 상원의원과 도널드 트럼프 등 공화당 대선 주자들은 ‘전략적 인내’의 폐기까지 주장하고 나섰다.(「시험대 오른 오바마 대통령의 대북 ‘전략적 인내’」, 한국일보, 2016.1.7.) 

(3)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대외정책 특징

선군외교

김정일 시대의 대외정책은 한 마디로 ‘선군외교’라고 규정할 수 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외교 특징에 대해 윤석열 당선인의 정무특보인 장성민 전 의원은 자신의 글 「김정일은 외교의 천재인가」(중앙일보, 2009.5.28.~31.)에서 자세히 분석하였다. 

장 특보는 선군외교를 “군과 군사력을 외교적 도구로 삼아 강대국 중심체제 속에서 대외적인 자주성을 유지하기 위한 전략”이라고 설명했다. 

장 특보는 북한이 지정학적으로 경쟁 관계에 있는 강대국 사이에 낀 첨예한 요충지라는 점을 활용해 한편으로 주변 강대국에게 경제적 지원을 이끌어내고, 다른 한편으로는 핵무기를 개발해 자국 주권에 대한 주변 강대국들의 위협 요인을 사전에 제거해버린다고 분석했다. 장 특보는 “미국과 국제사회가 중동의 이라크는 공격했어도, 그리고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정권은 붕괴시켰어도 왜 북한에 대해서는 군사적 공격을 하지 못했을까. 핵 미사일을 사실상 보유한 북한의 보복이 두려웠기 때문일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장 특보는 선군외교의 특징으로 ‘전시(戰時)외교’를 꼽았다. “대결과 배짱, 담력을 수단 삼아 마치 군이 전쟁을 치르듯 외교 투쟁으로 상대방을 제압”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2002년 4월 1일자 노동신문은 북한 외교가 “남들이 뭐라고 하든 흔들리지 않는 자주적인 외교이며, 배짱과 담력으로 맞받아 나가는 강경한 외교”라고 천명하였다고 한다. 이에 따라 북한의 외교관들도 서방의 ‘상인의 협상태도’가 아닌 ‘전사의 협상태도’를 가지고 있다고 설명한다. 

더 나아가 군부가 외교에 강한 영향을 끼치며 아예 외교의 전면에 나서기도 한다. 대표적인 사례로 2000년 10월 9~12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특사로 미국을 방문한 국방위원회 1부위원장 겸 인민군 총정치국장인 조명록 차수가 있다. 조명록 차수는 군복을 입고 클린턴 대통령을 만나 북미 사이의 주요 현안들을 합의하였다. 

주동외교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피동에 빠지지 않고 주동을 쥐는 외교를 한다. 장 특보는 이를 두고 “상대국을 자신이 설정해 놓은 프레임에 가둬 놓고 시작하지, 상대방이 쳐 놓은 프레임에는 절대 들어가지 않”는다고 설명한다. 장 특보는 그 사례로 1993년 3월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 선언을 들었다. 

당시 북한은 국제원자력기구(IAEA) 이사회의 결의에 따라 특별사찰 수용 압력을 받고 있었다. 만약 특별사찰을 수용할 경우에는 아무런 이득도 챙기지 못하고 손해만 볼 것이요, 수용하지 않는 경우는 국제사회의 압력이 한층 더 거세지는 상황을 맞게 되었다. 이때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NPT 탈퇴 카드를 꺼냈다. 그 결과 미국과 국제사회에서는 북한에 대한 특별사찰 대신 어떻게 하면 북한을 NPT 체제에 묶어두느냐 하는 문제가 최대의 외교적 과제가 됐다. 

장 특보는 이를 두고 “북한을 제대로 요리하겠노라고 벼르고 있던 국제사회는 하루아침에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꼴’이 되고 말았다”라며 “북한으로서는 ‘절묘한 선택’이었던 셈”이라고 하였다. 또 미국의 세계적인 북한 전문가가 이를 두고 ‘훌륭한 행동(brilliant act)’이라고 표현한 사실도 소개했다. 

직선외교

2001년 7월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러시아를 방문했을 때 콘스탄틴 보리소비치 풀리코프스키 대통령 전권특사가 24일 간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수행하였다. 풀리코프스키 특사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내겐 외교관이 될 자질이 없다. 외교관들은 검은 것을 희다고 하고 맛이 없어도 맛있다고 할 수 있어야 하는데 나는 항상 직설적으로 말하기 때문이다”라고 이야기했다고 전했다. 에둘러 가지 않는 직선외교인 셈이다. 장 특보는 이를 두고 “카리스마에 유머 섞인 거침없는 ‘직선형 외교’”라고 하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대화와 협상 자리가 냉각되지는 않는다. 장 특보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분위기를 금세 끝없는 유머와 순발력 있는 농담으로 바꾸면서 자신의 해박한 지식으로 좌중을 휘어잡는 카리스마를 유감없이 발휘하는 스타일”이라고 설명한다. 또 이런 과정에서 외교 상대는 어느새 주도권을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넘겨주고 만다고 하였다. 장 특보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탁월한 외교술은 거침없고 직선적인 성격에 좌중을 휘어잡는 유머감각과 해박한 지식”에서 나온다고 평가했다.

이렇게 보면 직선외교는 능수능란한 외교 실력이 있기에 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4)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군사외교전략이 지금의 북한에 미친 영향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대외정책은 국제사회에서 북한 위상을 변화시켰으며 북한 사회 내부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먼저, 북한이 세계 사회주의, 반제국주의, 반미자주를 선도하는 국가로 자리 잡게 하였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1990년대 초 동구권 붕괴로 사회주의에 대한 패배주의가 확산되자 이를 막기 위한 적극적인 활동을 하였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1992년 1월 초 논문 「사회주의건설의 역사적 교훈과 우리 당의 총노선」을 발표해 세계 사회주의 운동의 방향을 제시하였다. 이 논문은 일부 사회주의 국가가 붕괴한 원인과 교훈, 북한 노선의 정당성을 담고 있다. 1994년 11월 1일에는 논문 「사회주의는 과학이다」를 발표하였다. 이 논문 역시 동구권 붕괴의 원인을 분석하고 그럼에도 사회주의는 결국에 승리할 것임을 주장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두 편의 논문은 여러 나라에서 출판되어 사회주의자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또 1992년 4월 20일 김일성 주석 탄생 80돌을 계기로 모인 세계 여러 나라 당대표의 서명을 받아 평양선언 ‘사회주의위업을 옹호하고 전진시키자’를 채택, 발표하였다. 이 평양선언에는 처음에 세계 70개 공산당, 노동당, 진보정당 대표가 서명하였으며 2017년 4월 20일에는 서명한 정당이 300여 개에 이르렀다고 한다. 

사회주의 부흥 운동은 사회주의 체제를 붕괴시키려는 미국을 중심으로 한 제국주의와의 대결과 하나로 연결된다. 사회주의를 부흥시키고 반제국주의 운동, 반미자주운동을 불러일으키려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노력은 북미 대결 과정으로 이어진다. 미국을 중심으로 한 자본주의 세력에 포위되어 고립된 북한이 강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미국에 밀리지 않는 강경하고 원칙적인 외교를 펼치는 것을 보면서 세계 여러 나라도 미국에 대한 자세를 바꾸는 듯하다. 

 

러시아의 경우 미국에 끌려 다니던 옐친 대통령이 물러나고 2000년 푸틴 대통령이 집권하자 ‘강한 러시아’를 표방하며 첨단 전략무기 개발에 집중 투자하고 미국에 강경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중국의 경우 세계무역기구(WTO) 가입으로 자본주의권 경제에 편입된 후 미국의 대북압박에 동참하기도 하였으나 지금은 비타협적인 태도를 고수하며 미국의 횡포에 적극적인 제동을 걸고 있다. 베네수엘라도 1999년 취임한 우고 차베스 대통령이 강경한 반미정책을 펴면서 대표적인 반미국가 대열에 올라섰으며 이런 자세는 마두로 정부에도 이어졌다. 이 밖에도 이란, 시리아 등 여러 나라들이 미국의 횡포에 정면으로 맞서는 태도를 보였다.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소련·러시아 지도자로는 처음으로 2000년에 북한을 방문해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정상회담을 하였다. 이는 변화한 북한의 위상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이란도 핵개발을 하고 반미를 전면에 내걸면서 북한과 흡사한 길을 가고 있다. 미 정보기관은 북한의 핵, 미사일 기술자들이 대거 이란에 파견되어 핵, 미사일 개발을 돕고 있다는 보고서를 발표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이제 대표적인 반미국가, 반미 선도국가라고 하면 자연스레 북한을 꼽게 되었다. 

다음으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군사외교전략은 북한의 국방력이 미국을 뛰어넘게 만들었다. 

북한은 종종 “주먹이 약하면 그 주먹으로 눈물을 닦아야 한다”라는 말을 인용한다. 군사력이 약하면 패배의 눈물을 흘리게 된다는 뜻이다. 이와 관련해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사탕 없이는 살 수 있어도 총알 없이는 살 수 없다”라는 말을 하였다고 한다. 그만큼 열악한 경제 상황에서도 군사력 강화에 힘을 쏟아 넣은 것이다. 

그 결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핵무기 개발에 성공하였고 다양한 종류의 미사일도 개발할 수 있었다. 핵, 미사일 개발 성공은 북한의 군사력에 질적인 도약을 가져다주었다. 

이 과정에서 북한은 국방과학기술과 국방공업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 이를 토대로 개발을 거듭하여 오늘날 북한은 미국도 개발하지 못한 차량이동식 대륙간탄도미사일, 극초음속미사일 등을 개발하여 미국을 뛰어넘는 데 성공하였다. 

끝으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군사외교전략은 북한의 자립경제체제 강화에도 영향을 주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사회주의 체제를 고수하며 미국과 대결을 선택하면서 필연적으로 미국의 경제제재를 각오해야 하였다. 미국의 대북제재는 북한 경제 발전에 심각한 장애가 되었다. 물론 체제를 포기하고 미국 경제에 편입된 동구권 나라들이 겪은 심각한 경제혼란은 피할 수 있었지만 그에 못지않은 ‘고난의 행군’을 겪어야만 하였다. 

북한은 이를 극복하기 위해 자력갱생을 전면에 내걸었다. 자립경제체제 완비에 노력을 기울인 것이다. 위기를 기회로 만들고, 악재를 호재로 역전시키는 방식이다. 

이러한 전략은 지금 러시아가 따라하고 있다. 지난 3월 11일 알렉산드르 루카셴코 벨라루스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하면서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최근 몇 년은 서방이 우리를 제약할 때 우리가 새로운 기능을 획득하고 옛것을 새로운 기술적 수준으로 회복한다는 점을 보여줬다”라면서 “지금은 기술·경제적 주권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기회”, “독립성과 자급자족, 궁극적으로는 (이로 인한) 혜택을 느낄 기회를 더 얻을 것”이라고 했다. 우크라이나 사태로 대러시아 경제제재가 고도로 강화되었지만 오히려 자립의 기회로 삼고 있는 것이다. 

자립경제체제는 대규모 외자유치에 비해 단기간의 발전이 더딜 수 있지만 해외 자본에 의한 수탈을 피하고 대외 경제 환경에 의해 자국 경제가 좌우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실제로 북한 경제는 2008년 미국 발 금융공황이나 2019년 코로나19로 인한 경제침체에 별다른 타격을 입지 않았다고 한다. 

김정일 시대에 강화된 자립경제체제는 김정은 시대에 일정한 효과를 발휘하고 있다. 미국의 경제제재는 더욱 강화되었지만 북한 경제는 가파른 상승곡선을 그리고 있다. 마식령 스키장, 세포등판 목장, 려명거리, 삼지연시 개발 등 외부 지원이 끊긴 상태에서 보여준 북한의 개발 현장은 모두 자립경제체제의 성과라고 한다. 

이처럼 김정일 국방위원장 시기 개발한 핵과 미사일, 그리고 대외정책의 성과들은 오늘 김정은 시대 형성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고 할 수 있다. 

 

 

 

김민준 자주시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