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3. 2.

지난 11~12일 북한 만수대의사당에서 최고인민회의 제14기 제1차 회의가 열렸다. 최고인민회의는 북한의 최고주권기관으로 이번에 열린 회의는 지난 3월 10일 선거를 통해 새로 선출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이 모여 진행하였다. 조선노동당 대회가 노동당의 최고 행사라면 최고인민회의 회의는 국가의 최고 행사라고 할 수 있다.  
 
북한은 최고인민회의 제14기 제1차 회의를 앞두고 9일 노동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확대회의를 진행했고 10일에는 노동당 중앙위원회 제7기 제4차 전원회의를 열었다. 이 전 과정을 거치며 북한의 국가적 특징이 뚜렷하게 드러났다. 첫째는 전 세계가 주목하는 전략국가라는 점이며, 둘째는 김일성-김정일주의 국가라는 점이고, 셋째는 인민대중제일주의 국가라는 점이며, 넷째는 자존심의 강대국이라는 점이다. 이 특징들에 대해 차차 살펴보려 한다. 

 

4. 자존심의 강대국

이번 최고인민회의 과정을 보면 북한은 국가적 자존심이 무척 강하며 이를 매우 중요하게 여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 북한의 국가 정책과 활동의 모든 면을 자존심이 뒤덮고 있다

① 국가 창건 과정에서

북한의 주장에 따르면 북한의 국가 창건은 항일독립운동, 민족자주운동의 성과를 토대로 그 연장선에서 이루어졌다고 한다. 이는 국내의 많은 학자도 인정하고 있다. 예를 들어 광복 60년 기념사업 추진위원장이었던 강만길 교수는 2005년 4월 11일 임시정부 수립 86주년 기념식을 앞둔 기자 간담회에서 “김일성 주석의 항일 빨치산 운동도 독립운동으로 봐야 한다”고 밝혔다. 평화박물관 이사인 한홍구 교수는 일제의 기록을 인용해 김일성 주석이 “일제의 압박에서 벗어나 광복을 쟁취하고자 했던 우리 겨레의 염원에 대해서 무한한 용기와 기대, 그리고 신념을 솟구쳐주는 원천이며 그 상징”이었다며 “민족영웅”으로 볼 수 있다고 주장했다(2004년 7월 8일 한겨레21). 

김일성 주석의 회고에 따르면 소련이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기 직전인 1945년 여름, 소련군 총참모부가 소집한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모스크바를 방문한 적이 있다고 한다. 이 자리에서 김일성 주석은 여러 소련 인사들을 만났는데 그 가운데는 당시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위원이었던 즈다노프(Andrei Alexandrovich Zhdanov)도 있었다고 한다. 

즈다노프가 김일성 주석에게 해방 후 건국을 할 텐데 어떤 지원을 주면 좋겠냐고 물어보자 김일성 주석은 ‘소련이 독일과 4년 동안이나 전쟁을 했고 앞으로 또 일본과도 큰 전쟁을 치러야 하겠는데 무슨 힘으로 우리를 도와주겠는가, 도와준다면 물론 고맙겠지만 우리는 될수록 자체의 힘으로 나라를 일떠세우려고 한다, 힘들더라도 그렇게 하는 것이 장래를 위해서 좋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에는 역대로 사대주의가 망국의 근원으로 존재해왔다, 새 조국을 건설할 때는 사대주의로 인한 폐해가 절대로 없게 하자는 것이 우리의 결심이다, 우리가 기대하는 것은 우리나라에 대한 소련의 정치적 지지이다, 소련이 앞으로 국제무대에서 우리를 적극적으로 지지해주고 조선 문제가 조선인민의 이익과 의사에 맞게 해결되도록 힘써주기 바란다’는 취지의 답변을 하였다고 한다. 

그러자 즈다노프는 “얼마 전에 동유럽의 어떤 나라 사람이 나를 만나자마자 자기 나라는 본래부터 경제적으로 낙후한 데다가 전쟁피해가 막심해서 난관이 한둘이 아닌데 소련이 큰집이 된 셈 치고 도와주어야겠다고 하였습니다, 당신의 입장과 얼마나 대조적입니까, 이것이 바로 동방과 서방의 차이, 해 뜨는 나라와 해 지는 나라의 차이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실제로 해방 후 소련은 38선 이북에서 군정을 실시하면서 북한이 자체 판단과 힘으로 나라를 세우도록 보장하였다. 스탈린 소련공산당 서기장과 안토노프 소련군 참모총장은 1945년 9월 20일 연명으로 소련 극동사령관에게 비밀훈령을 보냈는데 그 내용을 보면 ‘▲북한 영토 내에 소비에트나 소비에트 정권의 다른 기관을 수립하거나 소비에트제도를 도입하지 말 것 ▲반일적인 민주주의 정당 단체의 광범한 동맹에 기초하여 북한에 부르주아민주주의 정권을 수립하는데 협조할 것 ▲반일적인 민주적 제 단체 및 정당의 조직을 방해하지 말 것이며 그 작업을 도와줄 것’ 등 북한의 독자적인 국가 창건에 개입하지 말라는 것들이었다. 그런데 김일성 주석은 소비에트도, 부르주아민주주의도 아닌 인민민주주의 정권을 수립했다. 

이처럼 북한은 국가 창건부터 자기 뜻, 자기 힘으로 해냈다는 자긍심을 가지고 있다. 

② 국가 발전 과정에서

북한은 국가 창건 이후 발전 과정도 철저히 자기 판단과 자기 힘으로 해냈다고 한다. 즉, 사대주의와 교조주의, 외세의 간섭과 압력, 강권을 배척하며 자립노선, 자력갱생, 자주외교를 표방하며 오늘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1955년 12월 28일 김일성 주석은 연설을 통해 “어떤 사람들은 소련식이 좋으니 중국식이 좋으니 하지만 이제는 우리 식을 만들 때가 되지 않았습니까”라며 소련, 중국 등 대국의 정책을 따라 해서는 안 된다고 밝혔다. 그러나 대국을 추종해야 한다고 여긴 소련파, 연안파 등 사대주의자들은 김일성 주석의 자주노선을 반대했다. 

이들은 심지어 1956년 6월 김일성 주석의 해외 순방에 맞춰 소련이 북한에 압력을 넣어달라고 부탁하기까지 하였다. 최창익 국가검열상은 6월 8일 이바노프 소련대사를 찾아가 노동당의 노선을 바꾸도록 소련공산당이 압력을 행사해달라고 요청했다. 소련 주재 대사인 리상조도 6월 16일 소련 외무성 극동국장 쿠르듀코프(Kurdyukov)를 만나 북한 노동당 당원들에게 직접 소련이 조언해달라고 요청했다. 리상조 대사는 9월 5일 흐루쇼프에게 서한을 보내 소련과 중국이 북한에 직접 개입해달라고 요청하기까지 하였다. 실제로 소련과 중국은 김일성 주석에게 압력을 가하며 내정간섭을 하였다. 

그러나 김일성 주석은 이에 굴하지 않고 1956년 12월 노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경제영역의 자립을 선언하고, 1957년 12월 전원회의에서는 정치에서 당의 독자노선을 추구할 것을 선언했다. 사대주의자들이 주장한 코메콘(COMECON:경제상호원조회의) 가입도 거부했다. 코메콘은 소련이 중심이 되어 사회주의 국가들의 경제를 분업화하는 것으로 북한은 코메콘에 가입할 경우 경제가 소련에 예속될 수 있다고 경계하였다. 

1960년대 들어 중국과 소련 사이에 갈등이 깊어지자 북한은 어느 한 쪽 편을 들지 않고 중립노선을 택했다. 북한은 1961년 7월 상호 주권존중, 내정불간섭, 평등관계보장 등을 내용으로 한 ‘우호 협조 및 상호 원조 조약’을 중국, 소련과 연이어 체결하였다. 

1964년 6월 16~23일 북한은 소련의 반발을 무릅쓰고 평양에서 제3세계 국가를 포함한 34개국이 참여한 ‘아세아 경제 토론회’를 개최했다. 마지막 날 발표한 선언 「자력갱생하여 자립적 민족경제를 건설할 데 대하여」에는 북한의 자립경제 건설 경험과 교훈이 담겨 있었다. 북한은 여기서 모든 나라가 정치적 독립을 달성한 후 자립적 민족경제를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모든 문제를 자기의 구체적 실정에 맞게 자주적으로 해결해 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진정한 협조’와 ‘사심 없는 원조’를 표방하며 간섭을 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며 소련과 중국을 에둘러 비판하면서 경제협력은 완전한 평등과 호혜, 자주성과 내정불간섭의 원칙에 기초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일성 주석은 1965년 4월 반둥회의 10주년 기념 비동맹회의가 열린 인도네시아를 방문, 연설을 통해 “사상에서의 주체, 정치에서의 자주, 경제에서의 자립, 국방에서의 자위, 이것이 우리 당이 일관하게 견지하고 있는 입장”이라고 선언하였다. 

또 북한은 1966년 8월 12일 노동신문 사설 「자주성을 옹호하자」를 통해 “우리 당은 지난시기와 같이 앞으로도 대내외 활동에서 독자성을 견지할 것이며 자주노선을 관철하여 나갈 것이다”고 선언했다. 북한의 자주노선은 소련과 중국에 의한 대국의 간섭에 저항하며 사대주의, 수정주의, 교조주의를 반대하고 완전한 평등, 자주, 상호존중, 내정불간섭의 원칙에 따라 북한의 구체적 실정에 맞는 정책을 구현하는 것이다. (김응서, 「1960년대 중반 북한의 자주외교노선 채택에 관한 연구」, 서울대학교 대학원, 2012. 참조)

1968년 1월 23일 북한은 동해를 통해 영해를 침범한 미국의 정보수집함 푸에블로호를 단속하였다. 이에 미국은 핵항공모함 두 척을 포함해 대규모 무력을 한반도에 집결시켜 배와 승무원을 돌려달라고 압박을 하였다. 그러나 북한은 영해 침범을 인정하고, 사과하고, 재발 방지 약속을 하라며 맞섰다. 전면전이 어렵다고 판단한 미국은 소련을 압박했다. 북한이 소련 말은 들을 것으로 여긴 것이다. 하지만 오산이었다. 

미국의 압력을 받은 소련 외무부는 소련 주재 북한 대사를 호출했다. 그러나 여러 차례 호출에도 북한 대사는 꿈쩍도 안 했다. 우리로 치면 미 국무장관이 호출했는데 미국 주재 한국 대사가 모른 척 한 셈인데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아무튼 북한이 호출을 거부하자 화가 난 소련 외무차관이 직접 차를 몰고 북한 대사관을 찾아갔다. 그러자 북한은 최하위 외교관인 삼등서기관을 내보냈다. 미국의 압력에 굴복한 소련 관리라면 삼등서기관이 상대하는 게 적당하다는 의미였다. 

당시 소련은 물론 동유럽 국가들까지 나서서 북한에 양보를 촉구했다. 자칫하면 미국의 핵공격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북한은 ‘미국이 잘못했으니 미국의 사과를 받아내겠다’는 입장에서 절대 물러서지 않았다. 결국 전쟁 위협도, 외교압력도 통하지 않자 미국은 치욕을 무릅쓰고 북한의 요구 조건을 수용했다. 승무원이 석방되기 전날 밤 존슨 미 대통령은 방송에 출연해 “북한은 소련의 이빨이 안 들어가는 나라”라고 하소연했다. 

90년대 들어 한반도 핵문제가 불거졌고 2000년대에 와서는 북한이 핵보유를 공식화하였다. 이 과정에서 미국은 물론 중국, 러시아도 북한을 압박했다. 하지만 북한은 세계 ‘최강국’이라는 미·중·러의 압력에도 굴하지 않고 기어이 2017년 국가 핵무력을 완성했다. 

북한이 중국, 소련(러시아)의 간섭과 압력도 물리쳤으니 미국의 강권과 압박에 굴하지 않은 것은 당연하다. 70년 넘게 지속한 미국의 제재를 두고 북한의 김영재 대외경제상은 지난 2019년 4월 26일 연합뉴스 인터뷰에서 “제재를 백 년 하려면 백 년 하고, 천 년 하려면 해라”, “제재하는 게 재밌으면 계속하라”고 일갈했다. 

이처럼 북한은 대국의 간섭을 허용하지 않고 철저히 독자적인 판단과 자체 힘으로 국가를 발전시켰다. 

북한은 국가의 지도사상인 주체사상도 독창적인 사상이라고 설명한다. 물론 주체사상은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계승하고 기본원리를 인정한다. 하지만 주체사상은 철학의 근본문제부터 시작하여 철학적 원리들을 완전히 새롭게 밝히고 있어 두 사상의 관계를 “계승의 측면은 있으나 기본은 독창성”이라고 설명한다. 

반면 중국의 마오쩌둥 사상은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기본으로 중국 현실에 맞게 이론을 발전시킨 것으로 독자적인 사상으로 보지 않는다. 흔히 마오쩌둥 사상을 마오이즘(마오쩌둥주의)이라고도 하지만 정작 중국에서는 이런 표현을 쓰지 않고 주로 ‘마오쩌둥 사상’이라는 용어를 쓴다. 왜냐하면 마오쩌둥주의라는 이름을 사용하면 마르크스주의와는 별개의 이데올로기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중국현대철학연구회, 『처음 읽는 중국 현대철학』, 동녘, 2016. 참조)

이렇게 북한은 어떤 상황에서도 다른 나라의 간섭과 압력을 용인하지 않고 철저히 자신의 판단과 자기 힘으로 국가 발전을 이루어왔다는 자긍심을 가지고 있다. 북한은 자존심으로 똘똘 뭉친 나라라고도 할 수 있다. 

③ ‘북괴’는 없다

과거 국내에서는 북한을 ‘북괴’라고 부르다 언젠가부터 슬그머니 ‘북한’으로 부르고 있다. 물론 지금도 군부나 수구반북세력이 ‘북괴’라는 표현을 쓰기는 하지만 사회에서 보편적으로 쓰지는 않는다. 

‘북괴’란 북한 괴뢰의 줄임말이며 ‘괴뢰’란 꼭두각시를 말한다. 나라를 두고 괴뢰국이라고 하면 독립국의 형식은 있어도 실제로는 다른 나라에 종속된 나라를 말한다. 만주국이나 프랑스 비시정부가 대표적인 괴뢰국이다. 하지만 북한을 괴뢰로 부르는 건 전혀 사실과 맞지 않다. 북한은 국가 창건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다른 나라의 지시에 따라 움직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일부 반북인사들조차 ‘북괴’란 표현은 괴뢰의 뜻을 제대로 몰라서 생긴 오해라며 표현을 바꿔야 한다고 주장할 정도다. 

한홍구 교수는 앞의 글에서 “(북한을 괴뢰로 부르는 것은) 해방 직후에 남쪽에서 정권을 잡은 친일파들로서는 불가피한 일이었을 것이다...(중략)... 이 ‘꼭두각시’는 소련의 해체로 자신을 조종할 배후가 없어졌는데도, 여전히 혼자서 춤을 추는 ‘괴뢰’치고는 참으로 희한한 괴뢰였다”라고 풍자했다. 

괴뢰국을 달리 풀이해보면 다른 나라의 ‘승인’을 받아 움직이는 나라다. 

개성공단 재개는 입주업체의 간절한 소원이며, 우리 국민의 경제생활에도 대단히 긍정적 영향을 준다. 금강산 관광 재개도 많은 국민의 열망을 실현하는 것이다. 금강산 관광이 가능했던 시기에 누적 관광객 수는 근 200만 명에 달했다. 이처럼 개성공단, 금강산 관광 재개는 우리 국민의 요구며 이익이다. 그런데 우리 국민을 위한 이 두 가지 사업을 한국 정부가 독자적으로 결정하지 못하고 미국의 승인에 목매달고 있는 현실을 깊이 돌아보아야 한다. (계속)

문경환 주권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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