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2. 19.

지난 2월 8일은 북한의 조선인민군 창건 75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이날 북한은 열병식을 비롯해 다양한 행사를 진행하였다. 북한의 군사력이 한반도는 물론 국제 질서에 미치는 영향이 날로 커가는 가운데 북한의 군대를 역사적으로, 학술적으로 자세히 살펴보는 것은 중요한 문제다. 이에 주권연구소는 4회에 걸쳐 기획연재를 준비하였다. 

차례
1. 김일성 주석과 조선인민군
2.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조선인민군
3.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조선인민군
4. 조선인민군의 3가지 특징


1. 김일성 주석과 조선인민군


1) 김일성 주석의 조선인민혁명군 창건


북한에는 건군 관련 기념일이 2개다. 하나는 2월 8일 건군절로 1948년 김일성 주석이 조선인민군을 창건한 날이다. 다른 하나는 4월 25일 조선인민혁명군 창건일로 1932년 김일성 주석이 만주에서 반일인민유격대를 창건한 날이다. 반일인민유격대는 1934년 조선인민혁명군으로 개편된다. 북한은 조선인민혁명군이 인민군의 뿌리라는 의미로 4월 25일을 건군절로 삼아오다 2018년에 이르러 건군절을 2월 8일로 옮겼다. 

북한의 기록에 따르면 김일성 주석은 1930년 6월 30일~7월 2일 길림성(吉林省) 장춘시(长春市)에서 진행한 카륜회의를 통해 ‘무장투쟁 노선’을 채택하였으며, 1931년 12월 15일 길림성 안도현(安图县)에서 진행한 명월구회의를 통해 유격대 창건을 결정하였다고 한다. 

이에 따라 지금의 안도현 송강진(松江镇) 소사하향(小沙河乡) 무주촌(茂朱村) 북산(北山-당시에는 토기점골 등판이라 불렀다)에서 청년들을 모아 군사훈련을 시작했다. 1932년 3월 중순에는 동만주의 다른 현에 조직된 유격대 소조 지휘 성원 20명가량을 모아 이틀 동안 단기 훈련을 하기도 하였다. 유격대 창건 소문이 퍼져 인근 지역은 물론 국내에서도 청년들이 모였다고 한다. 

 

소사하 위치.


김일성 주석은 1932년 4월 하순 회의를 통해 입대지망자를 최종 심사하였으며 100여 명을 선발해 1932년 4월 25일 토기점골 등판에서 반일인민유격대를 창건하였다. 이상이 북한의 기록에 나오는 반일인민유격대 창건 과정이다. 

 

무주촌 중국인들이 모금하여 세운 기념비.


반일인민유격대 창건은 만주 지역 조선인 사회주의 세력 최초의 무장 부대 탄생이라는 의미가 있다. 당시는 민족주의자가 주축인 독립군 운동이 쇠락의 길을 걷던 때였다. 이런 시기에 사회주의 계열의 부대가 탄생한 것은 반일 운동의 흐름이 바뀌었음을 보여준다. 또한 기존 사회주의 운동이 분열과 갈등으로 지지부진한 가운데 김일성 주석이 주도한 신진 세력이 사회주의 운동의 선두에 섰음을 보여주기도 한다. 

1932년 탄생한 반일인민유격대는 1934년 조선인민혁명군으로 발전하였으며 해방 후 1948년 조선인민군으로 이어졌다. 초대 참모총장 강건, 초대 민족보위상 최용건, 초대 민족보위성 부상 김책, 평양학원(사관학교) 초대 원장 안길, 제1사단장 최광, 제2사단장 최현, 제8사단장 오백룡, 제105전차여단장 류경수, 제3여단 참모장 오진우, 보안간부훈련대대부 문화부사령관 김일 등 조선인민군 창건의 주역들은 모두 김일성 주석과 함께 항일무장투쟁을 했던 인물들이다. 

중국에서 출판된 『연변인민항일투쟁사』(최성춘, 민족출판사, 2005.) 155~156쪽에는 “그(김일성 주석)는 안도현 소사하 토기점에서 군사훈련반을 꾸려 항일 청년을 양성하였으며 구국군 부대의 대장 우학선과 협의하여 항일별동대를 건립하였다. 그리고 이를 토대로 1932년 4월에 안도항일유격대를 창립하였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 밖에 다른 중국의 역사 자료에서도 김일성 주석의 반일인민유격대 창건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 

반면 국내 학계에서 김일성 주석의 항일무장투쟁을 일부 인정하는 경우는 있지만 반일인민유격대 창건을 명시적으로 인정한 사례는 없다. 김일성 주석이 항일무장투쟁을 했다면 그 시작이 분명히 있을 텐데 아무도 그것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다만 역사 연구가인 고 이용섭 씨가 2015년 10월 16~21일 연변조선족자치주의 항일무장투쟁 사적지를 답사하고 정리한 기록이 있다. (이용섭, 「반일인민유격대 창건은 역사적 사실로 확증되었다」, 자주시보, 2015.12.26.) 국내에서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한 부분이다. 


2) 국내 언론의 조선인민혁명군 보도


국내에서는 김일성 주석이 지휘한 보천보 전투 등 일부분이 비교적 널리 알려졌을 뿐 조선인민혁명군의 활동은 거의 조명을 받지 못하고 있다. 국가보안법으로 인한 억압적 사회 분위기 속에서 김일성 주석이나 조선인민혁명군의 활동을 언급하는 것조차 금기시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보천보 전투 외에도 일제강점기 신문에는 김일성 주석의 항일무장투쟁 보도가 종종 등장한다. 이 가운데 몇 가지만 소개한다. (표기는 오늘날의 맞춤법에 맞게 수정하였다.)

“함남도 경찰에 들어온 무선전보에 의하면 지난 13일 무송현 서남 집단부락에 토병단 쌍산호 급 김일성 연합부대 200여 명이 습래하여 이주 동포 부락에 전부 불을 질러놓고 폭행 중이라는 급보를 접한 무송현 치안대와 경찰대 100명은 즉시 현장에 출동하였다는 바 전기 습격을 받은 이주 동포 촌은 근 50여 호의 집단부락으로 방금 이주 동포들은 모두 죽었는지 살아있는지 알 수 없다고 하나 여하간 그 피해가 극히 크다고 추측된다고 한다.” (「소연한 압록강 대안!」, 조선중앙일보, 1936.8.19.)

김일성 주석이 일제강점기에 발행된 언론에 처음 등장한 기사로 추정된다. 이 기사에 나오는 사건은 무송현성 전투의 일부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이 발행하는 세계한민족문화대전이 소개한 무송현성 전투를 요약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김일성 주석이 이끄는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제6사의 주력 부대는 8월 16일 밤에 무송현성 서남쪽의 송수진을 공격하여 만주국군 소부대를 격멸하고 그곳을 점령하여 적의 주의를 끌었다. 이후 중국인 왕덕태를 총지휘로 하는 제2군 부대는 제4사 2단과 제6사, 그리고 만순·점산호·문명군 등 마적 계통의 항일의용군과 힘을 합쳐 총 1,800여 명의 병력으로 무송현성을 공격하였다. 일본군이 관동군 본부에 구원을 요청하여 비행기 2대, 그리고 주변에서 원군이 무송으로 달려왔지만 동북항일연군은 이미 멀리 철수한 뒤였다. 동북항일연군과 항일의용군까지 합세하여 전개한 대규모 시가지 기습 전투였다는 점에서 일본 관동군과 만주국 당국에 큰 충격을 준 사건이었다.”

이에 따르면 무송현성을 공격하기 위해 유인작전을 폈는데 그 일단이 위 기사에 실린 것이다. 기사에서 ‘쌍산호’로 나오는 인물은 ‘점산호’로 추정된다. 기사에는 무송현 치안대와 경찰대 100명이 출동했다고 나와서 유인작전이 성공했음을 알 수 있다. 

“장백현 내에 잠입해 폭위를 벌이고 있는 비적은 상관 방자 호농(대지주)인 이주 조선인 김정부 씨 외 6명을 납치했지만 그중 김만두 씨는 김정부 씨에 대해 현금 1만 엔, 다른 2명에 대해 각 현상금 1,500엔, 노동복·작업화 각각 125명분, 그 밖에 회중전등, 각종 약품, 의료품 등 다수를 강요한 협박장을 부탁받아 4일 상관 방자에 귀환했다. 김만두 씨의 보고에 따르면 적정은 대강 왼쪽에 적은 대로, 비적 수장은 동북연합혁명군 25군 사령부 정치부원 갑산군 회린면 석양리 출신 김일성(28)이며 그들은 2두강 서쪽 2리(혜산에서 8리)에 있는 큰 숲 안에 본거지가 있으며 100미터마다 초병을 두고 천교강(약 100호), 마가자(약 300호)를 중심으로 한 15여 리의 이주 조선인 부락(인구 약 1만 명)에 교묘하게 식량을 제공하고, 대단히 엄중한 경계 속에 팸플릿 등을 배부하며 공산주의 선전을 하고 있다.” (「동포 6명을 납치」, 경성일보, 1936.9.11.)

 

경성일보 기사.


경성일보는 조선총독부 기관지로 일제의 시각에서 쓴 기사임을 감안하여 볼 필요가 있다. 

기사에 등장하는 동북연합혁명군은 조선인민혁명군을 의미한다. 당시 조선인민혁명군은 여러 이름으로 불렸다. 예를 들어 중국인 부대와 공동작전을 펼 때는 동북항일연군으로 불렀고, 조선인에게 소개할 때는 조선인민혁명군이라 부르는 식이었다. 거기다 언론은 명칭을 정확히 표기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고, 일제의 시각에서 ‘공비’, ‘비적’, ‘공군(공산군을 뜻함)’ 등으로 표기하기도 하였다. 

또한 이 기사와 같이 조선인민혁명군이 민가를 약탈했다는 식의 보도가 많은데 당시에는 민간인이 조선인민혁명군에게 원호 물자를 전달하거나 물자 수송을 도와주면 처벌받기 때문에 일제의 탄압을 피하고자 약탈당했다거나 끌려갔다는 식으로 둘러대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또 친일 지주의 경우는 재산을 몰수하여 일부는 군자금으로 쓰고 일부는 소작농 등 주민에게 나눠주기도 했다고 한다. 

기사에 나오는 김정부 씨는 김일성 주석이 ‘애국 지주’로 회고한 인물이다. 김일성 주석은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서 위 사건을 자세히 소개하였다. 기사에 나오는 김만두 씨는 김정부 씨의 아들로 ‘부친이 비적에 억류되어 몸값을 지불하라는 협박을 받았다’는 명분으로 일제 군경을 속이고 조선인민혁명군에 막대한 돈과 군비 물자를 제공하였다고 한다. 

“(생략)… 지난 십일에 도경찰부에 들어온 정보를 보면 16도구 요방자에 옮겨온 동북인민혁명군 김일성의 일대 200여 명은 며칠 전부터 해동리 약 70호나 되는 이주 동포에 대하여 집마다 좁쌀 일두식을 제공하라고 매일 위협하고 있는데 동포들은 좁쌀은 없으므로 보리를 바치려고 모으는 중에 있다. 그리고 16도구 대덕수리에도 역시 김일성의 일대가 습격하여 …(생략)” (「대안 습래한 공군 극도의 식량난」, 조선일보, 1936.9.14.)

앞의 기사보다 3일 뒤에 나온 것으로 여기서는 ‘동북인민혁명군’이라고 썼다. 당시 국내에는 조선인민혁명군이나 동북항일연군의 정보가 많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 기사에는 김일성 주석의 부대원이 200여 명으로 나온다. 당시 일제는 민심이 조선인민혁명군에 쏠릴까 봐 사람들이 항일부대를 도적단으로 여기게끔 모략선전을 하였다고 한다. 

“동북인민혁명군 장백 파견 대장 김일성 일파 500명은 방금 19도구 흑활자 부근에 집결하여 장백부를 엿보고 있던 중 대안 혜산진에서 연일 토벌하므로 전기 장소에서는 과동할 수 없으므로 임강 무송현경에 웅거하고 있는 만순·만군의 합류대 약 400명과 합류하여 13·14도구를 습격하고 과동할 계획이라 하는바 만순·만군은 8도구에 당도하고 김일성군은 부운수 리명수 부근에 도착하였다고 하며 변장한 밀정을 대안 부락에 파견하여 일만(일제·만주국) 군경의 경비 상태를 내탐하며 서로 연락을 취한다고 하는바 신갈파 호인서에서는 철야 경계 중이라 한다.” (「김일성 만순·만군 합류 공군부대 장백부 습격 단념」, 조선일보, 1936.11.23.)

조선인민혁명군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는 보도다. 만순 부대는 앞의 무송현성 전투에도 등장하며 만군 부대도 마적 계통의 항일의용군이다. 북한 문헌에는 김일성 주석이 마적 집단을 설득하여 항일을 하도록 만든 사례가 다수 나온다. 

국내 학계는 흔히 1937년 6월 4일 보천보 전투 이후에 김일성 주석의 이름이 국내에 알려졌다고 본다. 하지만 그 전에 이미 김일성 주석의 이름이 언론에 여러 차례 등장함을 알 수 있다. 아래 기사로도 확인할 수 있지만 대략 1936년 봄부터 국내에 이름이 퍼진 것으로 보인다. 

“전기공산계 병비의 두목 김일성은 평양 출생의 올해 27세라고 하는 아직 연소한 자인데 김일성의 이름이 전하기는 작년 이른 봄부터로 그 세력은 확실치 않으나 장백현을 근거지로 지금까지 수시 출몰하였는데 종래에도 무기를 가지고 있은 것은 알려있던 바이나 이번에 경기관총 4대를 가졌던 것 등으로 보아 무기도 상당히 가지고 있는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또 김일성은 그의 아버지 때부터 만주에 건너가 그 방면에 참가하여 있는 것이라고 전한다.” (「김일성의 내력」, 조선일보, 1937.6.6.)

보천보 전투 직후 이런 식으로 김일성 주석과 조선인민혁명군을 소개하는 보도가 쏟아졌다. 

“김일성은 일찍부터 압록강 대안 장백, 무송현 하에 반거하여 코민테른의 사익 하에 소재의 주민에 대하여 공산주의를 고취하는 동시에 반만항일의 기운을 양성하기에 노력하고 혹은 일반군에 대하여 불령행동으로 만주국의 치안을 비상히 위협하였다. 그런데 모처에 들어온 정보에 의하면 지난 13일 만주국군 토벌대는 김일성의 주재지를 탐지하고 그곳을 공격하여 격전 5시간 후 그를 죽였다 한다. 과연 그것이 사실이면 오랫동안 질곡 하에서 신음하는 부민의 안전은 물론이요 국경지대의 치안에도 중대 관계가 있는 것이라 하여 조선군 당국에서는 자못 기뻐하고 있다 한다.” (「김일성 피살?」, 동아일보, 1937.11.18.)

물론 뒤에 오보로 드러났지만 이 보도를 통해 당시 김일성 부대가 일제의 만주국 치안을 ‘비상히 위협’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 기사에 나오는 ‘조선군’은 한반도에 주둔한 일제 군대를 의미한다. 일제가 보천보 전투의 치욕을 만회하기 위해 이런 오보를 돌린 것으로 추정된다. 

“지난 14일 이래 압록강 대안 장백현에서 성히 준동을 개시한 김일성 비단 600여 명은 대안 각처에 출몰하고 있었는데 17일 오전 0시 반경에는 함남 혜산진 직대안 3호 관채목공사의 인부 집을 습격, 인부 3명을 납치하여 인부들에게 조선 내의 경비 상황을 심문하고 동일 오전 10시경에 인부들을 석방하였다. 동 비단은 식량난에 빠져 대거 부락 습격을 기도하는 모양 같다. 일부는 백두산 산록에서 함남에 잠입할 우려가 있으므로 함남북 양도 국경 제 일선 경비에는 아연 긴장하여 엄계에 당하고 있다.” (「김일성 일파 600명 월경 습격의 태세」, 동아일보, 1939.5.19.)

600여 명은 언론 보도에 나온 김일성 부대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것으로 보인다. 북한 문헌에 따르면 조선인민혁명군은 벌목공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당시 벌목공은 주로 일본인 벌목회사에 고용되어 매우 열악한 생활을 했기 때문에 조선인민혁명군은 벌목공의 요구에 따라 일본인 관리자를 처단하거나 혼을 내주는 등 벌목공을 도와주기도 하였고 이에 많은 벌목공이 조선인민혁명군에 입대하였다고 한다. 

“간도성 안도현의 대마록구를 습격한 김일성 일파의 비단을 토벌키 위하여 출동한 만주국군 토벌대는 지난 25일 오후 4시 반 대마록구 서남지구 3리의 합수 지점 795고지에 이르렀을 즈음 돌연 산악지대에 잠복 중의 비단 약 200명이 습래, 비단은 여세를 타서 남하 조만 국경 부근에 이르러는 형세로 함북 3장서급 함남 혜산 신갈파의 각 경찰서에서는 관내 강안 일대를 엄계 중이라 한다.” (「김일성 일파 안도현에 습래」, 동아일보, 1940.3.29.)

북한 문헌에 따르면 김일성 주석은 위 기사에 나오는 것처럼 유인·매복전을 통해 많은 성과를 얻었다고 한다. 이 기사를 통해 1940년대에도 조선인민혁명군이 활동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후 1941년부터 해방될 때까지 김일성 주석의 소식은 언론에 더 이상 나오지 않는다. 이 기간에 조선인민혁명군이 정찰 위주의 소부대 활동으로 전환한 이유도 있지만 일제의 언론 검열이 심해진 결과일 수도 있다. 

 

3) 한국전쟁에서 나타난 조선인민군의 모습


한국전쟁 전반을 다루기에는 그 양이 너무 방대하므로 여기서는 몇 가지 사례를 통해 김일성 주석이 조선인민군을 어떻게 지휘했는지 그 특징을 살펴보고자 한다. 

● 대전 전투

1950년 7월 3일 인민군이 한강 도하작전을 시작했다. 이후 미군은 계속 밀려 대전까지 후퇴하였다. 미8군 제24사단(사단장 윌리엄 딘 소장)은 7월 17일 대전에 집결했다. 이때 김일성 주석은 대전 포위 작전을 명령한다. 미군을 남쪽으로 계속 밀고 내려가는 식이 아니라 포위 섬멸하면서 진격하겠다는 것이다. 인민군은 밤낮을 쉬지 않고 행군하여 대전을 완전히 포위하였다. 

7월 19일 새벽 시작된 인민군의 포위 공격은 20일 저녁까지 이어졌다. 사방에서 인민군에 밀리던 미군은 포위에서 벗어나기 위해 흩어져서 산을 넘기 시작했다. 사단장인 딘 소장은 탈출 과정에서 일행과 떨어져 길을 헤매다 전북 진안에서 인민군에게 붙잡혀 포로가 되었다. 흥미롭게도 2차 세계대전 당시 연대장이었던 딘 소장은 “전투에서 가장 치욕스러운 것은 적에게 포로로 잡히는 것”이라는 말을 외우고 다녔다고 한다. 

대전 전투에 투입된 미군은 약 4천 명이다. 이 가운데 48명 전사, 228명 부상, 874명 실종이라는 처참한 결과가 나왔다. 결국 미 제24사단은 제1기병사단으로 교체되었다. 반면 인민군은 탱크 15대가 파괴된 것을 제외하면 큰 타격을 입지 않았다. 

대전 전투는 미군이 전쟁 초반부터 고전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미군은 전쟁 마지막까지도 고전을 면치 못했다. 정전협정 체결 직전인 1953년 5월 중순부터 7월 하순까지 북한은 3차례 공세를 펼쳤다. 이 과정을 기록한 클라크 미군 사령관의 전황 보고를 인용해본다. 

“5월 후반부 2주 동안 적 중대들과 대대들의 맹렬한 공격은 1953년에 들어 지금까지 치러진 지상 전투 중 가장 격렬했으며, 병력이 적었던 몇몇 유엔군 전초진지들을 상실하는 결과로 끝났다.”

“5월에 시작된 격렬한 지상전은 6월에 더 격화되었다. 중대 규모로부터 사단 규모에 이르는 공산군 병력이 유엔군의 전초진지들과 주저항선 진지들에 대해 104번이나 강하게 몰아쳤다.”

“(공산군이) 24시간 동안 전선 너머로 퍼부은 폭탄 수가 131,800발이라는 새로운 최고 기록을 세우기도 하였다.”

“(7월 하반기에) 중대에서 사단 규모에 이르는 공산군 병력은 중부 전선에 연한 유엔군 전초진지와 주저항선 진지에 대해 무자비한 공격을 가하였다. 그 전선의 서부지구에서 유엔군은 중대 혹은 그보다 큰 규모의 적 공격으로 다섯 번의 전투를 치렀고, 중앙지구에서 스무 번, 동부지구에서 세 번의 전투를 치렀다.”

(이상 미 해외참전용사협회, 『한국전쟁·I』, 눈빛출판사, 2010, 739~743쪽.)

특히 7월 13~20일 중부 전선 금성 전투에서 유엔군은 5만여 명의 사상자를 내고 주요 고지를 빼앗기는 등 막대한 손실을 보았다. 

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하며 승승장구하던 미군이 독립한 지 몇 년 되지도 않은 작은 신생 국가와 전쟁을 하면서 고전할 것이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상대편 최고 지휘관이 유격전의 경험만 있을 뿐 정규전은 처음 지휘한다는 점에서 미국에는 더욱 충격이었을 것이다. 

● 제2전선

미군의 대규모 증원으로 낙동강 전선을 유지할 수 없게 되자 김일성 주석은 ‘전략적 후퇴’를 결정한다. 이와 함께 정규전으로서는 대단히 이례적으로 1개 군단에 맞먹는 규모의 제2전선을 구축하였다. 김일성 주석은 항일무장투쟁을 함께 했던 최현 2사단장에게 제2전선군을 맡겼다. 

미 2사단 한국군 선임참모 출신의 길광준 중령은 저서 『사진으로 읽는 한국전쟁』(예영커뮤니케이션, 2005.)에서 “이들(제2전선군)의 활동은 미군의 병참선 차단과 후방교란에 집중하여 상당한 효과를 거두었다”라고 평가했다. 한국군 5사단은 태백산·오대산의 3·4·5사단 제2전선군 4천 명에게, 한국군 9사단은 춘천·화천 일대의 10사단 제2전선군에게, 한국군 17연대는 시변리·철원·평강의 제2전선군 4천 명에게 후방에서 묶여있었고 미 3사단도 원산 상륙부대의 활동을 방해하는 원산과 함흥 지역의 제2전선군에게 묶여 북진하지 못하고 있었다고 한다. 또 “전선에 투입되어야 할 미 9군단도 북진에 참가하지 못한 채 서울-부산 간 병참선 방호작전에 매달려야만 하였다. 게릴라들(제2전선군)의 극렬한 활동으로 시변리, 평강, 함흥 지역의 도시가 한때 적의 수중에 들어가기도 하였다”라고 하였다. 

이런 제2전선 방식은 정규전에서 운용하기가 매우 어렵다. 정규군은 국가(후방)의 보급이 생명이기 때문이다. 예나 지금이나 보급로가 끊기는 순간 전쟁에서 패하는 게 상식이다. 

그렇다면 제2전선군은 보급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을까? 김일성 주석이 제2전선군을 조선인민혁명군 출신 최현 2사단장에게 맡긴 이유가 여기에 있다. 조선인민혁명군은 항일무장투쟁 과정에서 후방이 없이 지역 주민의 도움으로 식량과 옷을 해결했다고 한다. 무기는 적에게 빼앗아 충당할 수 있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민심을 얻는 것이다. 아마 김일성 주석은 인민군이 민심을 얻을 수 있다는 판단을 내렸기에 제2전선을 구축하기로 하지 않았을까 싶다. 

● 1211고지 전투

정전회담이 부진하자 1951년 9월 들어 미군은 추계공세를 시작했다. 추계공세의 핵심은 강원도 양구 1211고지 전투였는데 이 고지를 점령하면 미군은 원산까지 진격할 수 있었다. 한마디로 군사전략적 요충지다. 

9월 5일부터 16일까지 한국군 5사단 27연대가 3차에 걸쳐 1211고지를 공격하여 한 차례 점령하기도 했으나 결국 실패하였다. 17일부터는 35, 36연대가 41일간 8차에 걸쳐 공격했으나 끝내 고지를 점령하지 못했고 이후 다른 부대들도 끝내 고지를 점령하지 못했다. 북한 자료에 따르면 10월 20일까지 미군이 130여 회 공격을 되풀이했으나 8천여 전사자를 남긴 채 철수했다고 한다. (육군본부, 「교육참고 7-7-6 전장사례연구(3)」, 1987.)

북한에서 1211고지 전투로 유명한 인물은 ‘리수복 영웅’이다. 북한 기록에 따르면 리수복은 “불 뿜는 적의 화구를 몸으로 막아 조국과 수령을 보위한 육탄 영웅”이며 「하나밖에 없는 조국을 위하여」라는 시를 남긴 병사다. 

1211고지 전투에서 주목할 지점은 이곳이 낙동강 전투와 함께 한국전쟁 최대 격전지였음에도 김일성 주석이 직접 고지를 찾아갔다는 것이다. 김일성 주석은 1951년 9월 23일 1211고지를 방문하여 장병을 격려했으며 장병들은 김일성 주석 앞에서 결의를 다졌다고 한다. 북한은 전쟁에서 무기보다 사람(군인)이 더 중요하며, 특히 군인의 정신력이 결정적 변수라고 주장한다. 김일성 주석의 1211고지 방문은 이와 관련한 대표적인 사례라고 하겠다. 

 

화선 공개 당 총회에서 1211고지 사수 결의를 다지는 인민군 병사들.
맹세문을 쓰는 1211고지의 인민군 병사.



※ 편의상 중국 지명과 인명을 한국식 한자음에 따라 표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