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7. 13.

올해 7월 27일은 정전협정 체결 70주년이 되는 날이다. 한반도는 지금도 정전체제에 있으며 전쟁 위기가 상존한다. 정전협정이 어떻게 체결되었고 또 어떻게 파괴되었는지, 이 과정에서 드러난 문제점은 무엇이고 또 한반도 평화를 위해 어떤 노력이 있었는지를 살펴보는 것은 정전체제를 평화체제로 전환하여 이 땅에 평화가 깃들게 하는 데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할 것이다. 이에 주권연구소는 7.27 특집을 준비하였다. 

차례
① 정전협상 과정과 특징 - 상
② 정전협상 과정과 특징 - 하
③ 북한은 왜 7.27을 기념하는가
④ 정전협정 파괴의 역사
⑤ 평화협정을 누가 가로막았나
⑥ 유엔사의 실체와 문제점


정전협상 과정과 특징 - 하


정전회담은 1951년 7월 10일에 시작해서 1953년 7월 27일에 끝났다. 장장 748일을 진행한 것이다. 전체 전쟁 기간의 3분의 2가 회담 기간인 셈이다. 이 기간에 총 159회의 본회담과 765회의 각종 회담이 있었다. 회담이 이토록 오래 걸린 이유는 여러 쟁점과 고비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 가운데 특히 두 차례의 큰 고비가 있었는데 이를 중심으로 살펴본다.

 


1. 첫 번째 고비: 군사분계선


1951년 7월 10일 유엔과 북한은 의제 선정을 위한 첫 예비 협상에 돌입했다. 

첫 협상에서 유엔군은 ▲구체적 의제 채택 ▲국제적십자사 대표 포로수용소 방문 ▲한반도 내 순수한 군사 문제 토의 ▲한반도 무력 행위 재발 방지를 위한 세부 사항 토의 ▲군사분계선 내 비무장지대 설정 ▲적대행위 방지와 감시를 위한 군사정전위원회 구성 ▲군사정전위원회의 한반도 내 감시 수행 ▲감시행위를 위한 군사감시단 구성과 기능 설정 ▲전쟁포로에 관한 협정 등 9개 항을 제시했다. 

북한군은 ▲구체적 의제 채택 ▲38선을 중심으로 군사분계선 설정 및 10km 비무장지대 설치 ▲한반도에서 모든 외국군 철수 ▲전쟁포로에 관한 협정 등 5개 항을 제시했다.

첫 협상의 쟁점은 군사분계선 설정, 외국군 철수, 국제적십자사 대표의 포로수용소 방문 문제였다. 논란 끝에 양측은 7월 26일 ▲의제 채택 ▲비무장지대 설치를 위한 군사분계선 설정 ▲정전이행 감시를 위한 위원회 설치 ▲포로교환 문제 ▲외국 군대 철수와 한반도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해 관계국 간의 정치협상 개최 권고 등 5개 항의 의제를 합의하였다.

이에 따라 곧바로 군사분계선 문제부터 협상에 들어갔다. 유엔군은 유엔군이 우세에 있는 공군력과 해군력을 감안하여, 북한군이 점령하고 있는 현 전선의 위치에서 더 북쪽으로 물러난 선에서 군사분계선을 설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북한군은 지상군 대치선과 유사하며 전쟁 전의 경계선이었던 38선을 군사분계선으로 하여 이 선을 따라 남북으로 폭 10km의 비무장지대를 설정할 것을 주장했다. (김선숙, 「한국전쟁의 휴전협상과정에 관한 연구」, 『21세기정치학회보』 2002년 12권 2호, 2002. 70쪽.)

양측이 서로의 주장을 굽히지 않으면서 협상에 진전이 없자 미국은 8월 중순부터 무력 대응으로 방향을 전환했다. 유엔군 사령관 리지웨이의 전황 보고에 따르면 8월 17일부터 동부전선에서 감제고지를 확보하기 위한 치열한 전투가 있었고 진지는 반복적으로 주인이 바뀌었다고 한다. 또한 중폭격기가 거의 매일 나진항에 출격해 조차장과 철도차량에 3,417발의 폭탄을 투하하였다. 8월 16일부터 31일 사이에 심리전 전단을 4천만 장 가까이 뿌리기도 했다. (미 해외참전용사협회, 박동찬·이주영 역, 『한국전쟁 1』, 눈빛, 2010, 483쪽.)

9월 들어 유엔군은 추계공세를 시작했다. 추계공세의 핵심은 강원 양구 1211고지 전투였는데 이 고지를 점령하면 유엔군은 원산까지 진격할 수 있었다. 

당시 김일성 주석은 유엔군이 전선 서부에 무력을 증강하지만 이를 위장전술로 판단하고 부대를 전선 동부로 집중시켰다. 그리고 산이 많은 실정에 맞게 직사포를 고지에 끌어올려 효율성을 높이도록 하였으며 포를 집중적으로 배치해 기존의 2배 이상 늘렸다. 

특히 김일성 주석은 1211고지 방어에 큰 힘을 쏟았다. 최고사령부 작전실과 1211고지 방어부대와 직통전화선을 가설하고 무선통신망도 갖출 정도였다. 김일성 주석은 9월 23일 아침 1211고지에 잇닿은 1237.3고지에 올라 1211고지 방어를 맡은 북한은 제256군부대 지휘관과 담화하고 격려하였다. 26일 밤에는 제256군부대가 속한 북한군 제2군단의 최현 군단장에 전화로 후방 지원을 잘할 것을 당부하기도 하였다. (리준항,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 조국해방전쟁령도사 3』, 사회과학출판사, 2013, 40~45쪽.)

 

1211고지 전투 장면.
1211고지 방어부대 병사들.


9월 5일부터 16일까지 한국군 제5사단 27연대가 3차에 걸쳐 1211고지를 공격하여 한 차례 점령하기도 했으나 결국 실패하였다. 17일부터는 35, 36연대가 41일간 8차에 걸쳐 공격했으나 끝내 고지를 점령하지 못했고 이후 다른 부대들도 끝내 고지를 점령하지 못했다. 북한 자료에 따르면 10월 20일까지 유엔군이 130여 회 공격을 되풀이했으나 8천여 전사자를 남긴 채 철수했다고 한다. (육군본부, 『전장사례연구 3』, 육군본부, 1987.)

특히 미국은 하계, 추계 공세 기간 핵무기 사용을 적극 검토했으며, 비밀 해제된 미 육군 문서에 따르면 1950년 8월 중순에 이미 핵무기를 한국 전장에 배치했고, 1951년 9~10월에는 B-29 전략폭격기들이 평양 상공을 비행하면서 모형 핵폭탄을 투하하기도 하였다. (「미, 1951년 9, 10월 평양상공 모의원폭 투하」, 연합뉴스, 2010.10.10.)

유엔군의 하계, 추계 공세가 실패하자 정전협상이 재개됐고 유엔군 측은 현 접촉선보다 북쪽으로 군사분계선을 설정하자는 주장을 철회하고 대신 개성을 유엔군에 반환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에 북한군도 38선 안을 철회하였으나 개성 반환은 거부하였다. 당시 영국을 비롯한 미국의 동맹국들은 물론 미국 내의 여론도 정전협상을 빨리 진행할 것을 요구하였기 때문에 결국 유엔군은 개성 반환 요구를 접어야 했다. 

결국 11월 17일 분과위원회에서 군사분계선 설정 문제를 합의하고 1952년 1월 27일 본회의에서 최종 타결했다. 최종 타결안은 현 접촉선을 군사분계선으로 하며, 각각 2km씩 철수하여 비무장지대를 설치하며, 30일 이내에 정전협정이 조인되지 않을 경우 접촉선에서 발생한 변화에 따라 군사분계선을 수정한다는 내용이었다.

군사분계선 문제가 해결된 후 정전이행 감시를 위한 위원회 설치, 외국 군대 철수와 한반도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해 관계국 간의 정치협상 개최 권고 문제가 논의되었는데 상대적으로 원만히 해결됐다. 정전이행 문제는 1952년 1월 27일부터 논의되었는데 5월 2일 스웨덴, 스위스,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로 중립국 감시위원단을 구성하기로 합의하였다. 정치협상 권고는 1952년 2월 19일 양측 군사령관은 관계 정부에 정전협정이 조인되고 효력을 발생한 후 3개월 이내에 각기 대표를 파견하여 한 급 높은 정치회담을 소집하고 한반도에서 모든 외국군대의 철수 및 한반도 문제의 평화적 해결 등의 문제들을 협의할 것을 건의하는 것으로 매듭지었다.

 


2. 두 번째 고비: 포로교환


복잡한 문제가 모두 해결되고 마지막 남은 의제는 포로교환 문제였다. 포로교환 문제는 큰 어려움 없이 합의할 수 있으리라 예상했다. 포로의 대우에 관한 1949년 8월 12일 자 제네바협약(제3협약)(Geneva Convention Relating to the Treatment of the Prisoners of War of August 12, 1949) 제118조는 “포로는 적극적인 적대행위가 종료한 후 지체 없이 석방하고 송환하여야 한다”라고 명시하였다. 미국은 1951년 중반 이 협약을 비준했다. 따라서 포로교환 문제는 양측이 모든 포로를 송환하면 끝나는 단순한 문제였다. 그러나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이 문제에 정전회담 혹은 평화회담 사상 유례없이 오랜 시간이 걸렸다.

포로교환 문제가 복잡해진 이유는 미국이 포로송환에 부정적 입장을 보였기 때문이다. 미 육군 심리전 참모 로버트 매클루어 준장은 1951년 7월 5일 “미국은 이제까지 공산권을 상대로 자유세계로 망명해 오라고 심리전을 전개해 왔는데 공산군 포로를 강제 송환시키면 앞으로 누가 망명하려고 하겠는가?”라는 주장을 하며 ‘자발적 송환’ 원칙을 세우고 중국인민지원군 포로를 대만으로, 북한군 포로를 남한으로 보내자고 제의했다.

트루먼 미국 대통령 역시 유엔군이 장악한 포로의 수가 훨씬 많기 때문에 포로 전체를 교환하는 것이 손해라고 생각했다. 유엔군 측 포로는 13만 명이 넘지만, 북한군 측 포로는 1만 명을 넘는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김학준, 『한국전쟁』, 전영사, 2010, 336~337쪽과 342~343쪽.)

1952년 1월 유엔군은 포로 개인의 자유의사에 따른 자발적 송환의 원칙을 제시했다. 유엔군은 제네바협약이 포로 개인의 권리를 보장한 것이지 출신 국가의 권리를 부여한 것은 아니라는 논리를 내세웠다. 그러나 북한군은 제네바협약에 따라 전체 대 전체 방식으로 교환해야 한다고 반박했다. 유엔 내에서마저 제네바협약에 대한 해석상의 논란이 벌어지면서 여러 나라들이 다양한 중재안을 내놨지만 포로교환 문제는 해법을 찾지 못한 채 협상은 지지부진한 상황이 되었다.

이 와중에 미국 대선 시기가 다가왔다. 한국전쟁이 지지부진하면서 트루먼 대통령의 인기는 급락했고 급기야 1952년 3월 29일 재선 포기 선언까지 하였다. 이에 반해 공화당은 2차 대전의 영웅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장군을 영입해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아이젠하워는 선거 출마를 결심하고 5월 초 나토 최고사령관직을 사임했으며 그 후임에 리지웨이 유엔군 총사령관을 임명했다. 이 바람에 유엔군 총사령관이 미8군 사령관 마크 클라크로 바뀌었고 덩달아 협상 대표도 윌리엄 해리슨으로 바뀌었다.

 

클라크 사령관(왼쪽)


클라크 사령관은 “공산주의자들과 싸워서 이기는 길은, 하나도 힘이요 둘도 힘이며 셋도 힘이다”라며 협상이 지지부진하면 힘으로 밀어붙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때부터 유엔군은 강경한 태도를 취하기 시작했고 해리슨은 부임 후 첫 협상에서 일방적 휴회 선언을 하고 퇴장해 버렸다. 클라크 사령관은 6월 23일 압록강 주변 수력발전 시설을 집중적으로 공습하기 시작했다. 사흘 동안 1,400회 이상 출격하여 수풍댐을 비롯한 10개 이상의 발전소를 공격하였다. 8월에는 1,254차례에 걸쳐 평양을 비롯한 주민 밀집 지역을 폭격했다. (김선숙, 앞의 글, 90쪽.)

그러나 북한군의 양보를 끌어내는 데는 실패했다. 9월 29일 클라크 사령관은 “공산군의 사기는 결코 떨어지지 않았고, ‘뛰어난, 극도로 잘 조직된 방어적 위치’를 차지한 채, 충분한 병참 지원을 받고 있으며 군사력이 월등히 우세한 형편이다”라고 평가했다. 결국 10월 8일 유엔군은 무기한 휴회를 선언하고 퇴장했으며 이때부터 반년 동안 협상은 열리지 않았다. (김학준, 앞의 책, 351~354쪽.)

1952년 11월 4일 대통령에 당선된 아이젠하워는 12월 4일 극비리에 한국을 방문해 전황을 둘러본 뒤 전쟁을 빨리 끝내기 위해 새로운 공세를 준비했다.

미국에 새 정권이 들어서고 신공세를 준비하고 있음을 파악한 북한은 이에 대비하기 시작했다. 김일성 주석은 당중앙위원회 제5차 전원회의 결론에서 ‘전투준비를 더욱 철저히 갖춰 신공세 기도를 앞질러 분쇄해 전쟁 승리의 전환적 계기를 마련할 것’을 강조하였다. 이에 맞게 해안 방어 능력을 강화하고, 부대 배치를 새로 하며, 병종 간 협동작전을 개선하고, 훈련을 강화하며, 현대전에 맞게 군수물자 생산을 늘리는 등 다양한 조처를 하였다. 

 

철원 근방을 돌아보는 아이젠하워 대통령 당선인.


이 시기의 주목할 만한 전투는 1953년 1월 25일 강원도 철원 역곡천 부근 T자형 고지 꼭대기의 감자고지(spud hill)에서 진행된 ‘스맥 작전(SMACK operation)’이었다. 미군은 폭격기, 탱크, 보병, 포병을 결합한 일종의 시범 전투를 준비하였다. 동맹국 고관들과 기자들까지 초청했으며, 전투 시나리오가 담긴 컬러 팸플릿도 나눠주었다. 새로운 방식의 성공적인 전투 작전을 홍보하여 동맹국들에 더 많은 군사 지원을 요구할 구상이었던 것이다.

폭탄과 네이팜탄을 먼저 쏟아부은 다음 탱크와 포사격을 퍼붓고 난 뒤 미 7사단 31보병연대가 고지를 향해 진격했다. 공군은 112톤의 폭탄을 투하했고, 탱크는 7만 7천 발의 포탄을 발사했으며, 포병은 11만 2천 발의 포를 발사했다. 4,500발의 박격포와 5만 발의 기관총알, 650개의 수류탄이 날아갔다. 그러나 미군은 수많은 사상자를 남긴 채 후퇴하였다. 기자들은 정부 고관들을 초청해 놓고 참패한 전투에 대해 혹평하였다. (Walter G. Hermes, 『Truce Tent and Fighting Front』, U.S. Government Printing Office, 1966, 385~389쪽.)

북한은 이 고지가 T자형으로 생겼다고 하여 정형(丁形)고지 전투라 부른다. 당시 김일성 주석은 전투 하루 전날인 1월 24일 오후 5시에 급보를 받고 최고사령부 예비 포병부대를 급히 파견해 유엔군이 미처 예상하지 못한 방향에서 집중포화를 하도록 하였다고 한다. 부대는 밤새워 기동해 새벽 4시까지 전투 준비를 마치고 미군이 공격을 개시하기 위해 위치를 노출한 시점에 일제 포사격을 가해 치명타를 주었다. (리준항, 앞의 책, 386~388쪽.)

 

T자형 고지.


유엔군의 1월 공세가 무산되자 유엔군은 결국 4월 26일 정전협상을 재개했다. 송환을 원치 않는 포로들을 어떻게 할 것인지가 쟁점이었는데, 북한은 송환을 원치 않는 포로들을 중립국 송환위원회에 넘겨 6개월 동안 소속 국가와 면담하는 안을 제시했다. 이에 유엔군은 ‘송환을 원하지 않는 포로 전원은 중립국 송환위원회에 인계하며, 그러나 남한지역 출신 포로들은 정전과 동시에 북한지역이든 남한지역이든 그들이 갈 곳을 스스로 결정할 자유와 함께 일반인의 신분으로 석방되도록 한다’는 제안을 했고 북한은 이를 강력히 거부하였다. (김선숙, 앞의 글, 2001, 93~94쪽.)

북한은 유엔군을 굴복시키기 위해 1953년 5월 13일~7월 27일에 걸쳐 3차례 공세를 펼쳤다. 이 과정은 클라크 사령관의 전황 보고에 잘 나와 있다.

클라크 사령관은 “5월 후반부 2주 동안 적 중대들과 대대들의 맹렬한 공격은 1953년에 들어 지금까지 치러진 지상 전투 중 가장 격렬했으며, 병력이 적었던 몇몇 유엔군 전초진지들을 상실하는 결과로 끝났다”, “5월에 시작된 격렬한 지상전은 6월에 더 격화되었다. 중대 규모로부터 사단 규모에 이르는 공산군 병력이 유엔군의 전초진지들과 주저항선 진지들에 대해 104번이나 강하게 몰아쳤다”, “(공산군이) 24시간 동안 전선 너머로 퍼부은 폭탄 수가 131,800발이라는 새로운 최고 기록을 세우기도 하였다”, “(7월 하반기에) 중대에서 사단 규모에 이르는 공산군 병력은 중부 전선에 연한 유엔군 전초진지와 주저항선 진지에 대해 무자비한 공격을 가하였다. 그 전선의 서부지구에서 유엔군은 중대 혹은 그보다 큰 규모의 적 공격으로 다섯 번의 전투를 치렀고, 중앙지구에서 스무 번, 동부지구에서 세 번의 전투를 치렀다”라고 보고했다. (미 해외참전용사협회, 앞의 책, 739~743쪽.)

특히 7월 13일~20일 사이의 중부 전선 금성전투에서 유엔군은 5만여 명의 사상자를 내고 주요 고지를 빼앗기는 등 막대한 손실을 보았다. (위키백과 ‘금성전투’ 항목.)

 

금성전투 장면.


북한군의 공세가 이어지는 동안 협상이 이어졌고 여기서 유엔군은 남한지역 출신 포로들에 대한 자유송환 입장을 철회하고 중립국 송환위원회에 포로 관리를 맡기자는 북한군 제안을 받아들이는 대신 포로 면담 기간을 6개월에서 90일로 단축하는 데 합의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이승만 대통령이 크게 반발하면서 6월 18~19일 이른바 반공포로를 석방하는 사건을 일으켰다. 당황한 미국은 한국군을 동원해 쿠데타를 일으켜 이승만 대통령을 몰아내려는 ‘에버레디(Everready)’ 작전계획을 세웠다가 방위조약을 체결해 주면서 달래는 선으로 마무리했다. 

이승만의 포로 석방 사건은 명백한 유엔군 관리 책임이었기에 북한의 강력한 항의를 받았고 미국의 협상을 더 수세에 빠지게 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1953년 7월 27일 유엔군과 북한군은 정전협정에 조인하면서 장장 748일에 걸친 협상을 마무리하고 전투를 중지하게 되었다.

협상의 전 과정을 보면 유엔군과 북한군 모두 협상에서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 군사력을 동원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전쟁은 외교의 연장”이라는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의 명제를 다시 떠올리게 한다. 결국 정전협상의 결과는 유엔군과 북한군 사이에 누구의 군사력이 더 우세한가에 의해 결정되었다고 할 수 있다.

 

문경환 주권연구소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