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8. 1.

(이어서)


● 반도체 지원법


2022년 8월 미국은 ‘칩스(CHIPS) 및 과학법’, 일명 ‘반도체 지원법’을 제정했다. 이 법은 미국 반도체 산업 발전을 위해 약 2,800억 달러를 지원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구체적으로 미국 내 반도체 공장에 390억 달러의 보조금을 주고, 25% 세금 공제 혜택을 주며, 반도체 연구 및 교육에 130억 달러를 지원한다. 신규 반도체 공장 건설의 경우 최대 15%까지 보조금을 줄 것으로 보인다. 반도체 업계는 과연 누가 저 보조금을 받을 것이냐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특히 한국의 삼성전자, 대만의 TSMC 등 미국에 반도체 공장을 짓는 기업들은 과연 자신도 보조금을 받을 수 있을지 긴장했다. 당장 삼성전자가 올해 말 완공을 목표로 미국 텍사스주 테일러시에 건설하는 파운드리 공장의 경우 건설비를 애초 170억 달러로 예상했지만 원자재 가격 상승으로 올해 상반기에 250억 달러로 예상치를 높여야 했다. 만약 미국 정부의 보조금을 최대로 받는다면 37억 5천만 달러, 대략 5조 원가량을 받을 수 있다. 대출과 보증까지 포함하면 60억 달러로 늘어날 수도 있다. 

 

삼성전자 테일러시 공장. [출처: 삼성전자]


마침내 올해 2월 28일(현지 시각) 미국 상무부는 반도체 지원법에 따른 보조금 지급 기준을 발표했다. 무려 75쪽에 달하는 세부적 조건을 만족해야 보조금을 받을 수 있는데 여기에는 ▲기업 정보 공개 ▲시설 접근권 ▲보조금의 75%에 달하는 초과 이익 환수 ▲중국 공장 가동 제한 등 온갖 독소 조항으로 가득했다. 미국이 약탈자의 본색을 여과 없이 드러낸 것이다. 

미국반도체산업협회(SIA)와 보스턴컨설팅그룹은 지난 2021년 「불확실한 시대에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 강화」라는 보고서를 제출했다. 이에 따르면 미국·한국·대만·중국에 첨단 반도체 공장을 짓고 10년간 운영했을 때 드는 비용이 미국은 100, 한국·대만은 78, 중국은 63으로 나왔다. 정부 보조금, 건설비, 인건비, 전기·수도 요금 등의 차이에 따른 결과다. 따라서 정상적인 기업이라면 미국이 아닌 중국에 공장을 지을 것이다. 

그런데도 삼성전자가 미국에 막대한 돈을 쏟아부으며 반도체 공장을 짓기로 한 것은 미국이 당근과 채찍을 휘둘렀기 때문이다. 미국은 한편으로 중국에 공장을 지으면 제재한다고 협박하고 다른 한편으론 미국에 공장을 지으면 대규모 지원을 해주기로 약속했다. 그런데 인제 와서 ‘너희 중국 공장 문 닫고, 반도체 기밀 내놓고, 초과 이익도 돌려준다고 약속하면 지원금 줄게’라고 하니 누가 봐도 강도 혹은 사기꾼이나 다름없다. 

1970년대까지 세계 반도체 시장은 IBM, 모토로라, 인텔 등 미국 기업이 60%를 차지하며 장악하고 있었다. 하지만 일본 정부가 반도체 기업을 육성하면서 1980년대 일본이 미국을 추월하였다. 그러자 1986년 미국은 미일 반도체 협정을 강제로 체결해 일본 반도체 기업을 주저앉혔다. 그리고 2000년대 들어 일본의 빈자리를 한국, 대만이 차지하였다. 이제는 반도체 지원법으로 한국, 대만을 주저앉힐 차례가 됐다. 

글로벌경제신문은 3월 8일 자 「[기자수첩] 끔찍한 미국 반도체 지원법‥“Fend off!”」(‘fend off’는 ‘피하라’는 뜻)에서 “일종의 독소조항으로 읽히는 보조금 세부 조건은 단순히 미국이 현재 기술 패권 경쟁을 벌이고 있는 중국을 겨냥한 것을 넘어, 그동안 삼성전자 등 한국 기업들이 현지 투자 등을 통해 미국의 반도체 등 산업 정책 발전은 물론 일자리 창출에 기여해 왔다는 점에서 저의가 의심스러울 정도”라고 지적했다. 미국의 반도체 정책이 중국을 견제하는 것을 넘어 동맹국인 한국을 약탈하려는 것으로 의심된다는 주장이다. 

미국이 이런 날강도 행위를 통해 반도체 산업을 다시 장악하려고 하니 미국 내 반도체 기업 주가가 오르는 것이다. 

하지만 과연 미국의 반도체 산업이 기대만큼 부활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미 증권 전문지 마켓워치는 지난 5월 31일 엔비디아 주가에 상당한 ‘거품’이 들어있으며 주가 붕괴가 일어날 확률이 80%에 이른다고 분석했다. 

일단 한국이나 대만이 순순히 약탈을 당해줄 것이냐의 문제가 나선다. 벌써 삼성전자나 TSMC가 미국 공장 투자에 회의적이라는 보도가 나오고 있다. 

지난 7월 20일 류더인 TSMC 회장은 전문인력 부족과 인건비 등 악조건을 이유로 미국 애리조나에 신설하는 반도체 공장 가동 시기를 2024년에서 2025년으로 늦춘다고 발표했다. 애리조나 공장은 TSMC가 처음으로 대만이 아닌 나라에 첨단 반도체 미세공정을 도입하는 공장으로 주목받았으며 삼성의 테일러시 반도체 공장과 더불어 바이든 정부의 해외 반도체 공장 유치의 대표적인 성공 사례로 꼽혔다. 그러나 미국의 반도체 지원법에 따른 보조금 지급 기준이 공개되면서 TSMC가 손해를 감수하고 미국에 계속 투자할 이유가 크게 줄어든 것이다. 

 

류더인(마크 류) 회장. [출처: TSMC]


삼성전자도 고민이 많다. 조선일보 3월 18일 자 보도 「삼성전자 미국 반도체 공장 신설 회의론 나온다…왜?」에 따르면 반도체 업계에선 “반도체 공급망을 구축하겠다는 미국의 투자 매력도가 현실적으로 크게 떨어진 상황에서, 과연 미국에 갈 필요가 있느냐”, “미국 생산 기지 구축 계획을 재검토해야 한다”라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고 한다. 또 삼성 사정을 잘 아는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국내 반도체 투자 여건이 개선되고 있어 기존에 세워뒀던 미국 투자 계획을 재검토해 볼 여지가 충분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이런 가운데 삼성전자는 지난 3월 15일 용인 시스템반도체 클러스터 조성에 20년간 300조 원을 투자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미국 테일러시 파운드리 공장에 투자하는 돈의 10배가량이다. 

반도체 산업에는 숙련된 과학기술자가 많이 필요하다. 그런데 미국에는 이런 숙련된 인력이 너무 부족하다. 한국의 두뇌들이 의대에 집착하듯 미국의 두뇌들은 쉽게 돈을 벌 수 있는 금융업을 선호하기 때문이다. 뉴욕타임스는 올해 1월 1일 보도에서 “최근 반도체 업계 임원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인재 부족’이 가장 어려운 과제 중 하나”라고 하였다. TSMC도 인력 문제를 이유로 미국 반도체 공장 가동 시기를 늦췄고 삼성전자, SK하이닉스도 미국 공장에서 근무할 인력 확보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는 미국의 반도체 산업 부활의 커다란 장애물이다. 

더 근본적으로는 중국을 배제하고 미국 반도체 산업이 살아날 수 없다는 문제가 있다. 

중국에 반도체 공장 투자를 막고, 반도체 수출도 가로막는다고 중국이 당하고만 있을 리가 없다. 중국의 반도체 기술은 미국, 한국, 대만에 비해 1~2년, 일부 분야에서는 4~5년 정도 뒤떨어진 것으로 평가된다. 따라서 중국이 지금처럼 반도체 산업에 국가적 투자를 지속하면 이 정도 격차는 조만간 뒤집힐 수 있다. 그래서 미국 내에서도 중국을 고립시키면 오히려 중국의 반도체 자립 능력만 키우는 꼴이 되고 이에 따라 그나마 있던 중국 시장을 잃어버릴 것이라고 우려하는 것이다. 국제반도체장비재료협회(SEMI)는 지난 3월 28일 「300밀리미터 팹 전망 보고서」에서 중국이 향후 4년 내 반도체 생산능력 점유율 1위에 오를 것으로 전망했다. 

게다가 현재 반도체 최대 시장인 중국을 봉쇄해버리면 미국이 제아무리 반도체를 생산해도 판로가 없어지는 꼴이 된다. 지금의 반도체 산업 구조는 중국이 반도체를 수입해 전자제품을 만들어 수출하는 형태다. 이걸 끊어버리면 반도체는 반도체대로 판매할 곳이 없고, 전자제품은 전자제품대로 공급이 줄어 가격이 오르게 된다. 미국 반도체 기업은 파산하고 미국인은 값비싼 전자제품을 사야 하는 것이다. 

세계 반도체 시장에서 중국을 배제하자는 ‘탈동조화(디커플링)’를 외치던 미국이 결국 중국을 굴복시킬 힘이 부족하다는 것을 깨닫고 최근 장관급 인사들이 줄지어 중국을 찾아가 저자세를 보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지난 4월 26일 세계경제연구원 주최로 서울에서 열린 국제콘퍼런스에서 앤 크루거 전 국제통화기금(IMF) 수석부총재는 “이번 반도체 지원법이 매우 실망스럽다”라며 “보호무역주의가 새로 확대되는 분기점이 된다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경험했던 것보다 더 거대한 세계 경제 침체를 초래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는 특히 “미국 안에서 모든 반도체를 자체 생산하려는 목표는 달성 불가능하고 나중에 (바이든의) 끔찍한 실수로 판명될 수 있다”라고 경고했다. 미국 내 반도체 생산 원가가 기존 글로벌 분업체제 방식보다 40~50% 높아져 미국 내 여러 제조상품 가격이 대폭 뛰게 될 것이고, 반면에 이 비용을 미국 정부가 대규모 재정보조금으로 해결하려 들면 재정적자 문제만 더 키우게 되리라는 주장이다. (「“바이든 반도체지원법은 실현 불가능…재정적자만 더 키울 것”」, 한겨레, 2023.4.26.)

 

 

4. CIA 국장 “탈동조화는 바보짓”


지난 7월 1일 영국에서 열린 강연에서 윌리엄 번스 미 중앙정보국(CIA) 국장은 “미중의 경제가 상호보완적인 점을 감안할 때 미중 탈동조화는 멍청한 짓, 바보 같은 짓”이라고 말했다. 그는 “중국은 국제 질서를 재편하려는 의도와 경제적, 외교적, 군사적, 기술적 힘을 가진 국가”라며 “이 같은 국가와 탈동조화를 추진하는 것은 위험하다”라고 말했다.

최근 미국 내에서 탈동조화 정책이 실패했음을 인정하는 발언이 자주 나왔기에 번스 국장의 주장도 새로운 건 아니다. 다만 정보기관의 수장이 중립적이고 절제된 표현 대신 ‘멍청한 짓’, ‘바보 같은 짓’이라는 감정적인 표현을 사용한 게 눈에 띈다. 

이는 미국 내에서 탈동조화를 두고 찬반 세력이 상당한 갈등을 겪고 있음을 암시한다. 다시 말해 번스 국장은 ‘바보 같은 탈동조화 세력 때문에 미국이 위험해졌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미국의 군수업체 록히드마틴은 우크라이나 전쟁 덕에 올해 2분기 순이익이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5배 이상을 기록했다고 밝혔다. 셰일 가스 업체 등 에너지 기업도 전쟁 특수를 누리고 있다. 이런 기업들은 전쟁이 지속, 확대되기를 바란다. 그러나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언제까지나 단물을 빨아먹기는 힘들다. 우크라이나 전쟁을 대체할 새로운 전쟁이 필요하다. 가장 적당한 곳이 바로 중국-대만이다. 

『반도체 전쟁(칩 워)』의 저자 크리스 밀러는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반도체, 사실 군사 목적으로 개발됐다”, “반도체는 미국의 군사적 우위와 직결된 이슈다”라고 하였다. 지금의 반도체 탈동조화가 단순히 경제 문제가 아니라 안보 문제라는 것이다. 반도체를 둘러싼 미중 갈등이 언젠가는 군사적 갈등으로 비화할 수 있다는 말이 된다. 아마도 군수업체나 에너지 기업은 중국-대만 전쟁이 발발하기를 기대할 것이다. 

그러나 반도체 기업이나 이와 연계된 산업에 속한 기업들은 처지가 다르다. 세계 최대 반도체 시장인 중국이 없으면 살아남기 힘들다. 

지난해 애플이 바이든 정부의 탈동조화에 역행해 중국 기업인 양쯔강메모리테크놀로지(YMTC)를 메모리 반도체 신규 납품처로 선정했다가 정부의 압박에 결국 포기한 일이 있었다. 애플 처지에서는 가장 합리적이고 자본의 요구에 충실한 결정을 했다가 탈동조화 세력에 밀린 셈이다. 

 

YMTC 공장 전경. [출처: YMTC]


세계 최고 부자로 꼽히는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는 대놓고 자신이 ‘친중국’이라며 중국 시장을 절대 포기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는 지난 5월 중국을 방문해 ‘미국과 중국의 이익은 떼려야 뗄 수 없다’, ‘탈동조화에 반대한다’, ‘중국에서 사업을 계속 확장하겠다’고 말했다. 

이처럼 미국 내에서 전쟁과 탈동조화를 선호하는 자본과 이를 반대하는 자본 사이의 갈등이 치열하기 때문에 미국 정부의 정책도 오락가락한다. 탈동조화를 만능 무기처럼 꺼내 들었다가 몇 년 버티지 못하고 꼬리를 내린 것도 이 때문으로 보인다. 

 

 

5. 무너지는 세계 패권


세계 최강대국을 자처한 미국의 패권이 빠르게 무너지고 있다. 미국은 군사력과 경제력을 가지고 세계를 위협해 왔으나 최근 보이는 모습은 두 영역에서 모두 실패를 거듭하고 있으며 미국 뜻대로 되는 게 없을 지경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군수업체나 에너지 기업은 일시적으로 돈을 벌었을지 몰라도 전반적으로 미국 뜻대로 된다고 보기는 어렵다. 원래 구상대로라면 전 세계가 대러시아 제재에 동참해 지금쯤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실각하고 러시아는 미국, 유럽 자본의 놀이터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미국의 동맹국을 제외하고는 대러 제재에 동참하지 않았고 러시아는 전혀 무너질 기미가 없다. 심지어 동맹국들도 눈치를 보며 러시아와 거래를 계속하고 있다. 

 

제재에 동참한 나라는 미국의 동맹국뿐이다. [출처: Castellum.ai]


반도체 탈동조화 역시 동맹국의 호응 부족으로 결국 미국이 꼬리를 내린 형국이다. 중국을 봉쇄해 경제 패권을 지키겠다는 미국의 구상은 사실상 실패로 귀결되고 있다. 

이 과정에서 동맹국의 이탈이 심각하다. 과거에는 미국과 손을 잡아야 이익이라는 견해가 많았지만 이제는 반대가 되고 있다. 7월 17일 미국 월스트리트저널은 유럽이 수십 년간 경험하지 못한 경제 침체를 겪고 있다며 이런 추세가 계속되면 2035년이면 미국과 유럽연합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 격차가 현재 일본과 에콰도르 격차만큼 커지리라 전망했다. (「“와인 안 마시고, 소고기 안 먹고…유럽이 가난해졌다”」, 뉴시스, 2023.7.20.) 즉, 유럽 처지에선 동맹이라는 미국 혼자 잘나가고 자기들은 망해가는 것이다. 그러니 이제라도 미국을 손절해야 하는지 갈등할 수밖에 없다. 

유럽뿐 아니라 대표적인 친미 국가였던 사우디아라비아가 미국에 등을 돌리고, 이스라엘이 미국과 갈등을 빚는 모습에 많은 이들이 격세지감을 느끼고 있다. 일본조차 러시아와 석유·가스 거래를 늘리고 있다. 미국이 중국, 러시아를 포위한다며 야심 차게 내세웠던 쿼드, 오커스, 인도·태평양 경제 프레임워크, 칩4 같은 것들은 아예 뉴스에서 사라진 지 오래다. 

이런 분위기를 아직도 파악하지 못하고 한미동맹에 집착하는 한국의 모습은 세계적으로도 사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다. 이대로 미국에 간이고 쓸개고 다 내어준 뒤에 과연 무엇이 남을지 걱정이다. (끝)